23 벨손드 가의 어린 도련님

 




23

벨손드 가의 어린 도련님



나른한 오후입니다.
당신은 침대에 엎드려 누워 다리를 가만히 흔들며
릭사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짧았지만 즐거웠던 버지니아에서의 여행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눈을 감으면 햇볕에 데워진 목장의 흙냄새와
와이너리에서 잔을 따라 흐르던 포도 향기가 희미하게 다시 떠오르는 것 같네요.
요트에 가만히 앉아 낚싯줄을 당기던 감각도,
파도를 가르던 배의 짠 바람기도 남아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이제 신혼방 공사도 거의 마무리되어
며칠만 더 있으면 이사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릭사엘과 둘이서 지낼 공간을 손수 꾸몄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뿌듯하네요.
유스텐:(눈을 감으며 기분 좋게 두 다리를 흔든다.) 아 - 모든 게 너무 좋고 순조롭다. 이렇게 좋은 일만 있어도 되나?
... 보통 이러면 꼭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그러지 않나. 안되는데...
끙 - 마음의 준비라도 해야 하나? 근데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지?
내가 가진 걸 하나씩 떠올려보면... (엄청나게 커다란 요새 같은 집, 돈도 많고 자상하고 ... ... 뜨겁기까지 한 남편, 입이 좀 거칠어도 착하고 바보 같은 친구까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구석이 보이질 않는다.) 으음...
(천장을 바라보고 벌러덩 눕는다) 에잇 - 언제부터 이런 대비를 했다고. 관두자... 한 번 죽어보기까지 했는데 그거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겠어?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면, 천장은 언제나 보던 문양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하고도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결마저 정적을 품어
고요가 두꺼운 천처럼 몸 위에 내려앉은 기분이네요.
그렇게 한참이나 할 일 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으면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둔 기이한 금속 장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매끈하면서도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표면.
기계와 수정, 유기체적 구조물이 융합된 모양새.
금속 부분이 빛을 흡수하면서도 기묘하게 굴절시켜
색과 질감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실키스와 모종의 거래를 해서 이 독특한 물건을 얻기는 했지만
당최 어떻게 사용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작동 방법에 관해서 릭사엘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릭사엘도 영 모르는 눈치였더랬죠.
어쩌면 실키스가 사용도 못할 것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그 뱀 새끼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긴 하죠.
유스텐:...그 새끼, 나한테 사기 친 거 아니야?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
당신의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속 장치는 영롱하게도 빛을 뿜어내며 반질거립니다.
당신은 별다른 의도 없이 손을 뻗어 장치를 매만져봅니다.
이전에도 단순히 만지는 것만으로는 반응하지 않았으니
크게 개의치도 않고 말이죠.
그때,
쨍-!
찰나 어지럽게 뒤틀린 빛이 방 안을 뒤덮습니다.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푸른 잔광이 당신의 시야를 삼키고
귀에 바람도 파도도 아닌 알 수 없는 진동음이 파고듭니다.
유스텐:(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며) 윽 - !
몸이 침대에 닿아 있음에도, 밑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낯선 중력이
당신을 잡아당깁니다.
숨을 고르려 하지만 목은 마른 모래를 삼킨 듯 막혀오고
심장은 제멋대로 빠르게 고동칩니다.
안개와 빛으로 뒤섞인 미지의 풍경이 열립니다.
.
.
.
그렇게 귀를 막은 채 얼마나 버텼을까.
안개처럼 흐릿했던 빛이 가라앉자,
눈앞에 고풍스러운 저택의 긴 복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낯선 목재 냄새와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금빛이 눈을 어지럽힙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성역의 건축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고풍스럽고 웅장한 인테리어와 장식들.
그것들이 당신이 발 디디고 선 이곳이
현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유스텐:
SAN Roll
기준치:51/25/10
굴림:30
판정결과:보통 성공
...릭사엘에게 말도 안 하고 와버렸는데
괜찮은 걸까요?
당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릭사엘이 얼마나 걱정을 할지부터 문득 걱정이 됩니다.
유스텐:내 인생도 참 기구하네... 이번엔 또 어떻게 된 거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뱀 새끼...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나 본데.' 근데 여기가 몇 년도야?
유스텐:
관찰력
기준치:55/27/11
굴림:39
판정결과:보통 성공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복도는 길고 반듯하게 뻗어 있습니다.
높고 하얀 천장에는 단순한 몰딩이 둘러져 있고
군데군데 십자가 장식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네요.
햇빛은 납유리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와
바닥에 붉고 푸른빛의 얼룩을 드리웁니다.
마치 성당의 제단 앞에서 본 듯한 경건한 분위기가 풍기네요.
벽면에는 성경 장면을 담은 작은 액자들이 일정 간격으로 걸려 있고
간혹 성직자 복장을 한 엄숙한 초상화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발밑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복도 중앙을 따라 깔려 있어
발소리를 삼키며 엄숙한 정적을 유지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발밑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합니다.
당신의 키가... 이렇게 작았던가요?
유스텐:...? (뭔가 이상함을 느껴 미간을 찌푸리고 두 손을 피고 내려다본다)
시선을 조금 옮겨 손을 내려다보면
열 살 남짓이나 되었을 법한 정도의 작은 손이
당신의 눈앞에서 꼼지락거립니다.
유스텐:설마.... 나, 어려진 건가?
이런 패널티(?)가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이 빌어먹을 뱀 새끼야! (화가 나서 괜히 허공에 외친다)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화를 씩씩 내고 있으면
낯선 공기 속에서 조용히 심장이 뛰는 소리가 삼켜집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다급하게 다가옵니다.
탁, 탁, 탁.
활기차게 바닥을 박차는 구두 소리.
당신이 고개를 돌리면, 짙은 남색 머리칼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 소년이 전력으로 복도를 달려오고 있습니다.
붉게 상기된 뺨과 잔잔히 흔들리는 셔츠 자락이
생기를 머금은 듯 함께 반짝입니다.
그러다 당신과 시선이 맞닿는 순간,
소년이 걸음을 멈추며 눈을 휘둥그렇게 뜹니다.
벅차오른 숨결 너머로 어깨가 들썩거리는 와중에도
시선에 놀라움과 호기심이 가득 차올라 있습니다.
당신이 이방인이어서일까요.
그러나 그 안에는 단순한 놀람뿐만이 아니라,
마치 오래 전부터 찾던 이상적인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떨림이 묻어납니다.



릭사엘:(짧게 호흡을 들이키고 내쉬다가, 머뭇거리며) 누... 누구야?
유스텐:(굳음) 어, 어.... '릭스랑 똑같이 생겼잖아...? 설마'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새, 새로 들어온 시, 시종....이라고 합니다.
릭사엘:으, 으응? 시종?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이상하다... 아버지께서 새로 내 또래의 시종을 들였다는 말씀은 안 하셨는데... (내 말동무로 들이신 건가? 흐으음 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유스텐:'안 믿는 눈치잖아.' (우물쭈물하다가) 일이 바쁘시니 저 같은 한낱 시종...의 존재를 잊어버리셨을지도... 네...
릭사엘:으음- (그래도 내 또래의 친구가 이 근처에 달리 있을 리도 없고...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 그래? 그럼 내 친구해주러 온 거야? 이전엔 어디서 살았어? 부모님은? 몇 살이야?
유스텐:(쉴새없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힌다) '여기 과거가 아니라 혹시 미래인 건가? 과거의 릭스가 아니라 설마 미래에 우리 둘 사이에 나온 .... ... 아니, 말이 안 되지, 미래에 누가 이런 성에 살겠어.' (고개를 젓다가) 그으-런 셈이죠.
부모님은... 안 계셔서 몰라요.
'나이...지금의 내가 몇 살인지는 모르는데.'
릭사엘:어, 엇...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말에 적잖게 당황한다) 미, 미안해... 그런 줄 몰랐어. (두 손을 모으고 조금 꼼지락거린다)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어... 내가 속상하게 했을까?
유스텐:'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습인데, 내가 아는 성격이랑 너무 달라서 어색하다...' 아니에요. 기억하기도 전이라서 괜찮아요. (떠보듯 힐끔거리며) 혹시 '뭐라고 불러야 해?' 음...제가 뭐라고 불러드려야 좋을까요?
릭사엘:음- 다들 나보고 도련님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내 또래를 본 게 오랜만이라 뭐라고 날 불러야할지 모르겠네... 너 편한대로 불러! 도련님이나 소백작님만 아니면 다 좋아. (슬쩍 다가가 귓가에 소곤거리며) 아! 다른 사람 있을 땐 빼고! 아버지께서 내가 시종이랑 편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다가는 경을 치실 수도 있거든!
아참-! 내 이름은 알고 들어왔겠지만 통성명도 해야지. (작게 헛기침하며) 흠흠, 릭사엘이야. 만나서 반가워! (조그마한 손을 펼쳐 네 앞으로 내민다)
유스텐:(눈을 크게 뜨며) 지, 진짜 릭사엘이라고요? '진짜 내가 과거로 온 게 맞다고???'
릭사엘:(눈을 휘둥그렇게 뜬 네 얼굴에 고개를 갸웃하며) 응? 응. 아, 설마 내 이름 모르고 들어왔어? 집사님도 참, 시종이 새로 들어오면 설명을 잘 해주셨어야지이- 내가 다음에 만나면 잘 말씀드릴게!
유스텐:아, 네에... 저 혹시 몇 살...이세요?
릭사엘:(고개를 마저 갸웃하며) 으응? 그것도 모르고 들어왔어? 나 열 살! (어서 악수하자는 듯 손을 위아래로 흔든다)
유스텐:'완전 꼬꼬마잖아...'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너와 악수한다)
릭사엘:(활짝 웃으며 신나게 악수하고는 손을 떼며) 넌 몇 살이야? 이름은?
유스텐:'몇 살까지 어려진 건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대답하지?' 유스텐... 유스텐 애쉬미어예요. 나이는 잘 몰라요. '어떡해, 진짜 모르는데...'
릭사엘:으응? 그래? (원래 고아인 건가? 물어보지 말아야겠다) 음- 그럼 통성명도 했고 인사도 했으니까, 같이 도망가자!
유스텐:(눈썹을 들어올리며) 에? 어디를... 누구로부터요?
릭사엘:오늘 의원한테 진찰받는 날인데, 받기 싫어서 도망가던 중이었어. 아버지도 참- 나 아픈 곳 없다고 해도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게 시키신다니까. (살짝 투덜거리며) 난 피 뽑는 거 질색인데- 아프단 말이야.
유스텐:'릭스도 어릴 때는 진짜 평범한 어린이였구나... 지금은 피를 철철 흘려도 아무렇지 않아하는데.'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풋 - 하고 웃는다) 피 뽑는 건 금방이잖아요.
릭사엘:으응, 그래도오... 피 보는 것도 무섭단 말이야. 의원 할아버지가 가지고 다니는 주삿바늘이 얼마나 큰지 네가 봤어야 해. (과장스럽게 팔을 양 옆으로 쭉 뻗고는) 완전 이만큼 크단 말이야!
유스텐:그렇지만 계속 집 안에서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아요?
릭사엘:그렇긴 한데, 오늘만 잘 피해가면 돼! 의원 할아버지는 외진 왕래라 시간 지나면 금방 돌아가시거든. (의기양양하게 턱끝을 살짝 올린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가자! (덥썩 네 손을 잡고 복도 끝을 향해 너를 끌어당긴다)
유스텐:(갑자기 같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어 눈을 깜빡이다) '일단... 릭스에게 맞출까.' (말없이 네가 이끄는 곳으로 뛰기 시작한다)
당신은 어린 릭사엘이 앞서 달리는 걸음에 맞춰
그를 따라 긴 복도를 내달립니다.
마루에 깔린 양탄자가 발걸음을 툭툭 받쳐주고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빠르게 스쳐갑니다.
고요하고 경건한 공간을 채우는 발소리에
릭사엘의 웃음 소리가 산뜻하게 실립니다.
복도의 끝을 돌면 커다란 창문 틈 사이로
여름의 열기를 벗어던진 가을의 냄새가 불어옵니다.
아직은 따듯하지만 서늘한 기운이
폐를 조급하게 들어왔다가 나옵니다.
삐걱, 릭사엘이 문을 밀고 나가면
한순간 눈앞은 탁 트입니다.
황금빛에 가까운 햇살이 정원의 수목과 잔디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분수대 위로 얇은 물안개가 떠올라 햇살을 부서뜨립니다.
바람결에 섞여 온 사과 냄새가 달큰하게 코끝을 메웁니다.
탁, 탁, 탁.
풀숲을 건너 달리던 릭사엘이 숨이 차오른 듯 웃음을 터뜨리다가
정원 구석 모퉁이를 돌아 조경수 위로 슬쩍 돌아 숨습니다.
두근두근, 이곳까지 달려온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감각과 함께
당신이 그를 따라 조경수 뒤로 슬쩍 같이 숨으면
어린 릭사엘이 숨을 헐떡이며 가느다란 나무 줄기에 등을 기대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빛내며 웃습니다.
...릭사엘도 어릴 때는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도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릭사엘:(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괜찮아? 뛰느라 힘들어?
유스텐:(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하아, 후우... (웃으며 고개를 도리질친다) 전혀요.
릭사엘:(네 거칠기 짝이 없는 숨소리가 힘들다는 걸 증명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하는 네가 재밌어서 키득키득 웃는다) 정말? 달리기 잘하나 보네. 다음에도 문제 없겠다.
유스텐:다음이요? 하하, 다음에도 이렇게 도망치려고요?
릭사엘:당연하지, 달리기는 신사의 기본 소양인걸. (앞뒤도 안 맞는 소리인 제 말도 웃겨서 키득거린다)
유스텐:그렇구나 - '근데 난 왜 도망친 거지?' 그런데 다음에도 설마 저랑 같이 도망을 치겠다는 건가요?
릭사엘:응!
넌 내 말동무 친구로 온 거라며. 그럼 당연히 나랑 놀아도 줘야지.
유스텐:그건 그렇지만, 제가 도망치는 데에 일조했다는 게 밝혀지면 저 여기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릭사엘:앗... 그건 안 되는데... (불현듯 자각한 사실에 아차한다) ...다음부터는 나 혼자 도망쳐야겠다... 어떻게 얻은 친구인데...
아버지께 말동무 되어줄 친구 데려와달라고 계속 부탁했었는데... 첫 동무 들여보내자마자 이런 일이 있는 걸 아시면... (살짝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마주 꼼지락거린다)
유스텐:(웃으며 네 손을 잡는다) 안 들켰으니까 아직 괜찮은 거 아닌가요?
릭사엘:(다가오는 네 손을 꼭 붙들며) 그건 그런데... 언제 들킬지 모르니까. 아버지께선 엄하시거든. 날 걱정하고 아껴주시긴 하지만 내가 가문의 후계라서 잘해주신다는 느낌이 강해...
사실 그래서 말동무로 들어온 시종도 네가 처음이야. 저택에 나랑 친해질 사람을 들이면 내 학습이나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익히는 데에 방해가 될 거라고 늘 내 부탁을 안 들어주셨거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건지.
유스텐:(뜨끔!) 하, 하하... 그러게요... '이거 잘못하다간 감히 소백작에게 하찮은 고아 따위가 말을 걸었다며 모가지가 날라갈 수도 있겠는걸.' 릭사엘, 제 존재는 비밀로 해줄래요?
릭사엘:으응? 갑자기 비밀? 그게 무슨 소리야? (갸우뚱)
유스텐:그러니까 음... '변명할 말이 더이상 안 떠오른다. 큰일났다.' 제가 사실, 가주님께 약속한 날보다 일찍 온 거라서요.
릭사엘:어어...?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밖에서 지낼 곳이 없었어?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숙소 내달라고 할까?
유스텐:(급하게 팔을 저으며) 아니! 아니에요! 오늘은 그러니까 어... 본격적으로 릭사엘의 말동무를 하기 전에 사전조사를 하러 온! 그런 거죠.
릭사엘:으응... 그래?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헤실거리며 바깥 동향을 슬쩍 살핀다)
(소곤거리며) 다행히 여기까진 안 찾아오는 것 같네, 다들. 이제 곧 의원 돌아갈 시간이니까 나가도 되겠다.
유스텐:(우뚝) '잠깐... 저택에 들어가도 되는 건가? 릭스 부모님께는 안 들킨다 쳐도... 릭스랑 같이 다니면 사용인들이 다 쳐다볼텐데.' (머뭇거린다)
릭사엘:(네 손을 붙잡고 수풀 밖으로 나가며,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잎사귀를 몇 잎 떼어낸다) 가자, 내가 아버지 모르게 간식 챙겨줄게. 스콘 좋아해?
유스텐:(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 그런데 제가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요?
릭사엘:그럼. 안 될 게 뭐 있어. 네 고용 상태야 아버지랑 집사만 알고 나머지 사용인들은 모를걸?
유스텐:혹시라도 릭사엘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제가 곤란해져서요...
릭사엘:설마 곤란한 일까지 생기겠어? 아버지께서 널 고용할 때 신원 확인은 다 하셨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유스텐:'다 뻥인데...' (양심이 쿡쿡 찔리는 걸 애써 무시하고) 그럼 다행이고요...
릭사엘:응! (히죽히죽 웃으며 네 손에 깍지를 끼고 정원 한가운데로 나간다)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남색 머리카락 아래 푸른 눈동자가
장난기 어린 빛으로 반짝입니다.
당신은 가만히 어린 릭사엘의 손에 이끌려가며
주변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때,
"도련님, 여기 계셨던 겁니까?!"
"찾느라 온 저택을 다 뒤졌습니다...!"
조급히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릭사엘이 움찔하며, 당신의 손을 쥔 손에 힘을 꾹 줍니다.
곧 눈앞까지 다가온 시종으로 보이는 사내가
허리를 굽혀 릭사엘과 시선을 맞추며 릭사엘의 의복을 단정하게 정돈시켜줍니다.
놀랍게도 그의 시선은
당신을 전혀 스치지 않습니다.
사용인:(도련님의 옷에 붙은 부스러기와 흐트러진 의복깃,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며) 혼자서 이렇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도련님.
릭사엘:괜찮다니까. 저택 안에서 길 잃는 것 말고 위험할 게 뭐가 있어?
사용인:그래도 언제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 모르니 조심하셔야지요... 요즘 저택 바깥 상황이 얼마나 흉흉한데요.
릭사엘:괜찮아, 이젠 혼자 안 다닐 거니까. (손에 잡고 있는 네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나 이제 같이 다닐 친구도 아버지께서 구해주셨는걸?
릭사엘은 당신과 맞잡은 손을 시종의 앞에서 휘휘 흔들어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당신을 스치는 일 없이
릭사엘만 오롯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바로 옆에서 숨쉬고 있고, 손까지 흔들리고 있는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사용인:(도련님의 흔들리는 손을 잡아 내리며) 백작님께서 그러실 분 아니신 거 아시잖아요.
릭사엘:아냐! 아버지께서 정말로 내 친구를 구해다주셨어! (시종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네 손을 잡으며) 이쪽 봐봐! 새로 올 시종이래! 이름은 유스텐이고, 앞으로 나랑 같이 지낼 거야!
사용인:(이상한 표정으로 정원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말이 없어진다) ...
유스텐:... ... '이거 혹시 내가 안 보이는 건가. 릭스한테만 보이는 거고...? 곤란한데. 이러면 또 거짓말을 해야 하잖아.'
어린 릭사엘은 신나게 당신의 손을 흔들며 자랑하다가
시종의 묘한 얼굴과 좀처럼 고정되지 않는 시선에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당신을 바라보고
입술을 가늘게 벌립니다.
릭사엘:... (동공이 크게 흔들리지만 가까스로 다시금 시종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명령한다) ... 곧 펜싱 교습 시간이군. 곧바로 이동할 테니 내 염려는 말고 저택에 돌아가 할 일을 하도록.
사용인:(한순간 달라진 분위기에 주저하다가) ...예, 도련님.
여전히 의문이 남은 표정을 한 채 시종이 눈앞에서 멀어집니다.
릭사엘은 시종이 정원의 조경수 너머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끈질기게 바라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당신을 돌아봅니다.
릭사엘:... 내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이 상황을 합당하게 설명할, 짚이는 것 있어?
유스텐:음... '벌써부터 일 났네. 하아 - 말이 씨가 된다더니. 아까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느니 어쩌고를 말하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어려도 릭스는 바보가 아니야. 수호천사니 뭐니라는 되지도 않는 변명 늘어놨다가는 괜히 안 좋은 인식만 박힐 수 있어.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답이지.) 제가 사실, 미래에서 왔어요.
릭사엘:...? (예상치도 못한 말에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장난치는 거 아니고?
유스텐:부모님도 없고 가진 거라고는 저 하나뿐인데 제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릭사엘: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데...) 그, 그래... (일단 알았다고 말부터 하고 나중에 뭐하는 애인지 알아봐야겠다)
어... 그러면 내 시종으로 왔다고 한 건, 거짓말?
유스텐:그렇죠. ...미안해요. 다짜고짜 솔직하게 말하면 안 믿어줄 것 같아서 그랬어요.
릭사엘:(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데... 얘는 진심인가?) 그, 그래... (으음... 망상증이 있는 거면 어떡하지? 아, 사람을 이렇게 나쁜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음... 스콘 먹으러 갈까...?
유스텐:'분위기 보니까 안 믿는 눈치인데. 몰라, 여기서 어떻게 말해 그러면... 또 거짓말을 할 순 없잖아.' 어... 방금 펜싱 교습 시간이라고...?
릭사엘:어... (무안해서 아무 소리나 뱉은 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음... 가져다줄 테니까 먹으면서 기다릴래?
유스텐:(어색하게 끄덕이며) 네에... '구경하고 싶은데...'
릭사엘:으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너, 너는 펜싱 할 줄 알아?
유스텐:전혀 몰라요. ... ... '분위기 어쩔 거야...' 그, 릭사엘은 생일이 언제예요?
릭사엘:으응? 아- (어색하게 화제가 전환됐지만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 숨을 내쉬며) 내 생일 8월 5일. 1858년.
넌 언제야?
유스텐:(질문에 반사적으로 년도 생각 안 하고 대답한다) 저는 2002년 5월 25일 생이에요.
릭사엘:...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 그래... 5월이구나. 봄이네.
유스텐:... ... 제 말이 거짓이라고 믿는 거죠.
릭사엘:(아니라고 차마 말은 못하고) ...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응...
유스텐:이해해요. 그렇지만... 릭사엘만의 수호천사라느니, 요정이라느니 하면 더 안 믿었을 거잖아요.
릭사엘:어... (수호천사와 요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는 네 얼굴을 잠깐 살펴보며) 믿... 었을 것 같아. (볼이 살짝 달아오른다)
유스텐:...? '이때의 릭사엘은 많이 순진한 건가?'
릭사엘:(살며시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큼, 흠... 스콘 가지고 옷 갈아입고 올게. 여기서 잠깐 기다릴래?
유스텐:(조용히 끄덕끄덕)
릭사엘:(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정원 인근의 정자까지 데려가며) 금방 다녀올 테니 기다려.
귓바퀴까지 붉어진 릭사엘이 당신의 손을 놓고
살짝 허겁지겁 저택 쪽으로 향합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네요.
릭사엘의 뒷모습이 서서히 시야에서 작아집니다.
정원을 가득 채운 달콤한 사과 향기 사이로
여전히 황금빛 햇살이 비치고
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칩니다.
그때,
팅-
묘한 울림과 함께 바람이 훅 방향을 바꿉니다.
유스텐:
관찰력
기준치:55/27/11
굴림:83
판정결과:실패
처음에는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줄로만 알았건만
곧 기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오릅니다.
공간 자체가 떨리고 있습니다.
시야의 끝자락이 물 위의 반짝임처럼 흔들리고
발 밑에서 무언가가 끌어당기듯 당겨집니다.
귀에서 낮은 울림이 북처럼 진동하며 두개골을 때리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빨라집니다.
까무룩 눈이 감깁니다.
.
.
.
세상이 한 순간의 파편처럼 부서지고
다시금 재건된 것처럼 눈꺼풀이 뜨입니다.
어둡고 낯선 공기가 느껴집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건너뛰었습니다.
휘청이는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오르네요.
사방은 짙은 어둠 속입니다.
공기는 낮의 정원과는 전혀 달라,
서늘하고 묵직한 밤의 냄새로 가득합니다.
머리 위로는 별빛조차 흐릿한 하늘이 펼쳐져 있고,
달빛이 거의 가려진 구름 사이로 희미한 은빛만이 흐릅니다.
멀리서 풀벌레가 간헐적으로 울어댑니다.
그 사이사이로...
유스텐:
듣기
기준치:60/30/12
굴림:86
판정결과:실패
작은 흐느낌 소리가 들려옵니다.
유스텐:'누가 우는 거지?' (툭툭 털고 일어나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본다)
당신이 몸을 일으켜 흐릿한 어둠 사이를 건너건너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정원 한 모퉁이, 키 작은 장미 덤불 옆에
어린 릭사엘이 웅크려 앉아 있습니다.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은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입니다.
유스텐:(네 우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애칭으로 부른다) 릭스...?
릭사엘:(훌쩍거리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 떤다) 누, 누구야...?
유스텐:(슬쩍) 어... 수호천사...?
릭사엘:(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깃으로 슬쩍 닦아내고 젖은 얼굴을 들어올린다) ...어떻게, 여기 있어? 사라졌었잖아. 영영 없어진 줄... 알았는데...
유스텐:'나도 이 원리를 모르겠다...' 으음... 눈 떠보니까 여기였어요. 이렇게 과거로 온 것 자체가 내 의지가 아니라서요.
릭사엘:(눈물을 다시 한 번 말끔히 닦아내며) ...말도 없이 사라져서 한참 찾았었는데, 반 년 넘게서야 보이는 게 이런 모습이라니. 면목이 없네.
유스텐:(쪼그려 앉아 너와 눈높이를 맞춘다) 왜 울고 있었어요?
릭사엘:으응... 별 것 아니야. 내가 나약해서 그렇지, 뭐... (울음을 겨우 삼키고 슬쩍 웃는다)
유스텐:(미소지으며 네 눈가를 손으로 가볍게 훑어준다) 별 것 아니어도 듣고 싶어요.
릭사엘:(다정한 손길에 살짝 무너진 표정으로 얼굴을 네 손끝에 비비며) ...오늘 가문에 수치를 입혔어. 성직 가문의 자제들 앞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성경 낭독을 했는데... 중간에 발음이 꼬여서 라틴어 구절을 잘못 읽었거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웃음거리가 됐고... 아버지께서 크게 호통을 치셨어. 그럴 만한 일이지...
유스텐:...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네요. (너를 위로하듯 두 팔로 꼭 안아주며) 릭사엘, 벨손드 가문은 고작 라틴어 구절을 잘못 읽는다고 위신이 떨어지는 가문인가요?
릭사엘:그건 아니지만... 오늘의 낭독은 중대한 일이었어... 가문의 명예를 보여주는 일이었단 말이야. (풀이 죽은 표정으로) 아버지께서 내가 가문을 욕보였다고 하시면서 크게 꾸짖으셨어. 난 슬퍼서 눈물이 났는데 도리어 '울음은 나약함이자 죄'라고 하셨어...
(네 품에 안겨 얼굴을 반사적으로 비비다가, 코끝을 간질이는 네 머리카락에 얼굴이 다시금 따뜻해진다)
유스텐:가문의 명예를 보여주는 일은 라틴어 낭독만이 아니잖아요. 기회가 단 한 번 뿐인 것도 아니고. (너와 눈을 마주치며) 백작님께서 너무하셨네요. 울음이 나약함이자 죄라면... 우리 모두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갖고 태어나는 거겠네요.
릭사엘:(네 말을 듣고서야 부스스 웃으며) 듣고보니 그렇네. 유스텐은 똑똑하구나. 처음엔 미래에서 왔다느니 뭐니 해서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유스텐:(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세운 채 주먹 쥔 손을 양 허리에 올린다) 훗 - ... 이상한 사람으로 본 건 너무해요.
릭사엘:하지만 내겐 너무도 생뚱맞은 소리였어. 미래에서 왔다니, 그런 걸 곧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잠시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지금은 믿어. 네가 사라지고 나서 네 행방을 찾았는데, 어디서도 자취를 발견할 수도 없었고..
...이렇게 다시 불현듯 나타난 걸 보아하니 거짓은 아니겠지. 네 표정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 같지 않고.
유스텐:다행이에요.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돌리고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첫 만남 때처럼 또 거짓말 하긴 싫었거든요.
릭사엘:좋아, 나도 거짓말하는 사람은 싫거든. (천천히 네 품에서 고개를 떼고 네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래도 갈 땐 간다고 말을 해주지 그랬어. (네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몰라 한동안 정원 정자에서 스콘을 들고 서성였는데... 이 얘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유스텐:미안해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 뜨고 보니까 밤이었어요.
릭사엘:(살짝 웃으며) ...눈 뜨고 보니 밤이 아니라, 9개월이 지났어. 난 너를 9개월만에 다시 보는 거야.
유스텐:9... 9개월이요???! '미친...!'
릭사엘:아하하, 그 표정을 보니 전혀 몰랐던 모양이네. 정말 네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가 보구나.
유스텐:하아... '생각해보니 실키스가 과거로 갈 수 있다고만 말했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는 전혀 설명을 안 해줬었네. 릭스의 과거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괜찮은 건가.'
릭사엘:(생각이 많아진듯한 네 등을 토닥여주며) 괜찮아, 난 그동안 별일 없이 지냈고 너 또한 그랬다면 안심이니까.
유스텐:...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의젓해지신 것 같아요.
릭사엘:...아무래도, 그때보다 상원 귀족들 앞에 나설 일이 많아진 지라.
크게 힘든 일은 없었지만, 9개월이면 사람이 충분히 의젓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잖아?
유스텐:그래도... 릭사엘은 고작 11살이잖아요.
릭사엘:음... 아직 크려면 멀었지만, 슬슬 행동에 책임지는 법을 배워가고는 있어. 내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유스텐:... 릭사엘은 어떤데요? 지금 모습에 대해서요.
릭사엘:음... (살짝 초연해진 표정으로)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지. 귀족 사회는 내 의견이나 생각 따위 중요치 않게 여기니까.
내가 걱정되는구나, 유스텐?
유스텐:(끄덕) '어린 당신은 좀 더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릭사엘:으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너에게 위안이 되려나. 잘 지내고 있다는 말로는 부족할까.
아, 맞아. 네가 없는 사이 좋은 소식이 하나 있었어. 어머니께서 남부로 요양을 가셨던 동안 병이 쾌차하셔서, 저택에 돌아오셨거든. 이제 가족이 떨어질 일 없는 게 내게는 무척 안심이 돼.
유스텐:그건 정말 잘 된 일이네요. 백작 부인과는 사이가 좋은 편인가봐요?
릭사엘:(끄덕) 응, 어머니께서는 다정하셔.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으시고 늘 조곤조곤하시지. 다들 입을 열기로 나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니, 어머니를 대하기 어렵지 않다는 건 예상이 가지?
유스텐:'우와 - 처음으로 자세히 듣는 릭스의 부모님 얘기...' 네. (빤히 바라보며) 저는 백작 부인을 한 번도 못 봤지만 엄청 아름다우신 분일 것 같아요.
릭사엘:(키득키득 아이처럼 웃으며) 내가 말한 건 성격쪽이지 외형쪽은 아니었어. 물론 난 둘 다 어머니를 닮은 편이긴 하다만.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그러고보니 넌 내 눈에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우리 가문의 혈통이나 다른 근원적인 이유에 따른 걸까. 전자라면 내 어머니를 네가 만나는 것도 어렵진 않을 텐데.
넌 짚히는 게 있어?
유스텐:'어머님 혼자 낳으셨나...' 음...제 생각에는 전자가 맞는 것 같아요. 나머지는 저도 잘...
릭사엘:그래? 하긴, 세상 일은 단순히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자주 일어나니 무리도 아니지.
유스텐:하하, 벌써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네요.
릭사엘:(슬쩍 웃으며) 9개월 동안 실종되었다가 나타난 수호천사가 할 말도 아니지 않아?
유스텐:끙 - ... 워, 원래 수호천사는 도움이 필요할 때 나타나는 법이라고요. 항상 붙어다니면 ... 그래, 그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고!
릭사엘:...그러면,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나타나줄 거야?
유스텐:'어... 시간이 흐르는 기준을 모르겠어서 답을 못하겠다.' 노력해볼게요.
릭사엘:좋아. (네 품에서 살짝 떨어지고는 손을 맞잡으며) ...난 이제 자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넌 어떻게 할래?
유스텐:'큰일났다. 잘 곳은 생각 못했는데.' 어... 노, 노숙?
릭사엘:(피식피식 웃으며) 공실이 넘쳐나는 저택이 코앞인데 노숙은 무슨 노숙이야.
유스텐:그치만 전 여기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걸요...
릭사엘:(네 손에 슬며시 깍지를 끼며) 재워줄게. 올라가자.
유스텐:'깍지 끼는 건 버릇인가?' (멍하니 깍지 낀 손을 바라보며) 으, 으응.
밤공기가 서늘하게 피부를 스칩니다.
정원은 고요하지만 풀벌레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정적을 조금씩 흔들고,
당신은 그런 정원을 릭사엘과 함께 가로지르며
저택 정문의 돌계단을 오릅니다.
발끝이 스치는 소리가 정원 한 켠의 분수대 소리와 섞입니다.
곧 이어 달칵 소리와 함께 실내로 들어서자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드는 샹들리에 홀이 있고
양옆으로 휘어지듯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 보입니다.
유스텐:
지능
기준치:55/27/11
굴림:74
판정결과:실패
이러한 구조를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긴, 오래된 고성이라면 거의 이러한 구조를 띄고 있기는 하죠.
현관을 지나 좁은 계단으로 접어들자
나무로 된 난간이 손바닥에 닿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미세하게 삐걱거려
고요한 저택 내부에 울림을 남기네요.
어둠 속에서 촛대의 작은 불빛이 길을 안내하듯
어렴풋이 앞을 밝혀주고
릭사엘은 당신을 데리고 계단을 오르고 올라
3층까지 다다릅니다.
그러다 마침내 복도의 끝에 닿자
릭사엘이 문을 달칵 열어 젖힙니다.
성인이 누워도 한참 남을 법한 크기의 침대가 달빛에 녹아 있고
오크 목재로 된 서랍 몇 개와 라틴어로 적힌 성경이 놓인 책상이 보입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화병에는 갓 피어나기 시작한 장미꽃 몇 송이가 담겨 있고
조금 떨어진 벽면에 촛불이 밝혀진 벽등이 보이는군요.
릭사엘:(가만히 너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며) 여기서 같이 자자.
유스텐:(눈을 크게 뜨며) 같이요??
릭사엘:별로야?
유스텐:그건 아니지만, 저는 귀족도 아니고 릭사엘도 평소에 혼자 잤을 것 같아서... 불편할까봐...
릭사엘:혼자 자긴 하지. 사실 남이랑 자본 적도 없고. 그래도, 침대가 넓어서 자는 데엔 무리 없을 거야.
유스텐:... 나랑 같이 자는 건 괜찮아요?
릭사엘:음... 글쎄. 괜찮고 말고 할 것 없지. 별일 없을 테니까.
유스텐:(안절부절) 바닥에서 재워줘도 괜찮은데...
릭사엘:친구를 바닥에서 재우는 집 주인이 어디 있어? 그건 예법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예의에도 어긋나.
유스텐:친구... (중얼거리다가 눈을 반짝이며) 우리 친구예요, 릭사엘?
릭사엘:? 응. 당연한 거 아니야? (고개를 갸웃거린다)
유스텐:아직 그런 사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잖아요.
릭사엘:난 9개월만이라니까?
그리고 음- 이런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거 아는데, 넌 믿음이 가.
유스텐:(친구라는 말에 기뻐서 씩 웃는다) 수상한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데 - 심지어 저는 어디선가 뚝 떨어진 사람이고.
릭사엘:(네 말에 슬쩍 웃으며) 진짜 수상한 사람은 그런 말을 본인 입으로 하지 않아. 그것도 몰라?
유스텐:(삐질;) 그, 그런가아 -
릭사엘:(키득키득) 그런 거지. 유스텐은 나보다 어리구나? 나이는 모른다고 했지만, 나보다 어린 게 분명해.
유스텐:(발끈) 지금은 릭사엘보다 나이 많거든요!
릭사엘:네 입으로 네가 2002년생이라며. 그럼 내가 훨씬 연상이지.
유스텐:그런 법이 어딨어요...!
릭사엘:'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르라'. 이 말도 모르는 건 아니지?
유스텐:...
릭사엘:그리고 너보다 내가 키도 훨씬 크잖아. 틀려?
유스텐:그거는...! '그야 당신은 원래 195cm나 클 예정이니까 그렇지!' (삐죽) 수호천사 퇴직할 거예요.
릭사엘:(발끈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키득키득 웃으며) 퇴직해도 결근이 너무 많아서 퇴직금 정산 못해주는데, 어디 가서 뭐하고 먹고 살게?
유스텐:'어린데 왜 이렇게 말을 따박따박 잘하는 거야?' (반박할 말이 튀어나오질 않아 입술을 달싹이다가) ... ㄱ, 결혼.
좋은 사람 만나서 평생 놀고 먹고 살 거예요.
릭사엘:(실소하며) 그러면 너랑 결혼할 아내는 무슨 죄야-
유스텐:(양심에 찔리는 말을 해서인지 시선을 피한다) 몰라요.
릭사엘:넌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내가 몸 담은 사회에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내가 이렇게 피로감 느낄 일도 없을 텐데.
유스텐:사회에 저 같은 사람만 있으면 큰일나지 않을까요...
릭사엘: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결혼해서 평생 놀고 먹고 사는 게 목표라서?
유스텐:그것도 있고... 저는 주어진 삶을 연명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라 큰 뜻을 이룰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릭사엘:(잠시 생각을 되짚다가) 성경 가라사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작은 것이라도 주어진 것을 충성되게 활용하는 삶이 신의 가르침이라 하였으니, 현재에 만족하는 삶 또한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 아닐까.
유스텐:하하! 그건 그렇죠. '성경 어쩌고는 뭔 소린지 못 알아들었지만.'
릭사엘:(웃을 만한 구절이 아닌데 크게 웃는 너를 보고는 키득거리며) 이해 못 했지, 유스텐?
유스텐:...
대충... 현재를 살아라 아닌가.
릭사엘:그 뜻이 맞기는 하지. (슬며시 웃으며 서랍으로 다가가 잠옷 한 벌을 꺼내며) 자, 이걸로 갈아입어. 편하게 자야지.
유스텐:알았어요. (잠옷을 받으며 갈아입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근데, 어디서 갈아입으면 돼요?
릭사엘:(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공간이 필요해? 그냥 입어도 되지 않아? 동성인데.
유스텐:아, '하긴, 귀족들은 옷도 시종들이 입혀주니까 상관없겠구나.' 그러면 여기서 갈아입을게요. (입던 옷을 벗고 주섬주섬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조금 크다.'
릭사엘:(네가 입은 잠옷 차림새를 보다가, 반대로 뒤집어진 옷깃을 제대로 펴주며) 좀 크네. 편하게 자라고 입힌 거니까 크게 신경쓸 만한 일은 아니다만.
유스텐:'어떻게 어려져서도 이렇게 아빠 옷 줏어입는 느낌이 나는 건지...이번에는 아빠가 아니라 형인가.' 릭사엘이 너무 커서 그렇잖아요.
릭사엘:(웃으며 정정해준다) 유스텐이 작은 거야.
유스텐:'어려서도 작다는 소리를...' (삐쭉) 잠이나 자죠.
릭사엘:그래. (가만히 침대의 이불을 정돈하고 너를 눕힌 뒤 벽등에 밝혀진 촛불을 입으로 후- 불어 끄고는, 침대 옆자리에 눕는다) 어때,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겠어?
유스텐:(힐끔) 불편할 게 있어요?
릭사엘:(이불을 끌어올려 네 어깨까지 덮어주며) 침대 온도라든가, 시트 촉감이라든가, 이불의 무게 같은 것 말이야.
유스텐:엄청 세심하네요. (몸을 네쪽으로 돌리며) 전 바닥에서도 잘 자는 사람이라 이정도면 황송할 정도예요.
릭사엘:바닥에서 자는 게 익숙하지는 않으면 좋겠는데. (졸린 눈을 깜빡깜빡거리면서도 네 얼굴에 고인 달빛을 시선으로 더듬는다) 미래에서 왔다면서, 바닥에서 자야 할 정도야? 그 시대쯤 되면 문명이 더 발달했을 줄 알았는데. 무려 천 자리 수가 다르잖아.
유스텐:(씁쓸하게 웃으며) 문명이 발달해도 빈곤층은 항상 존재하니까요.
릭사엘:...그럼 유스텐은 줄곧 바닥에서 잤었어? 그건 너무 슬픈 일인데...
유스텐:(속눈썹을 내리깔며) 좀 크고 나서는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됐지만, 이정도로 푹신하진 않았어요.
릭사엘:그랬구나... (속눈썹을 마주 내리깔고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내 침대에서는 얼마든지 잠들어도 좋아. 원한다면 언제든 재워줄게.
유스텐:(눈매가 휘어지도록 웃으며)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릭사엘:(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네 정수리를 톡톡 두드리며) 고맙기는. 자, 어서 자자. 이러다가 해 뜨겠어.
유스텐:응. 릭ㅅ, ...릭사엘도 잘 자요.
릭사엘:(한 번 더 네 어깨 위로 이불을 꾹 눌러 덮어주고는 말없이 웃고, 잠을 청한다)
.
.
.
깜빡, 깜빡.
당신은 다시금 눈을 뜹니다.
안개가 풀리지 않은 초원 위로 물먹은 공기가 당신의 몸을 한껏 파고듭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일정하게 다가옵니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릭사엘의 침실에서 같이 잠을 청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또 시간을 건너뛴 모양입니다.
유스텐:
지능
기준치:55/27/11
굴림:13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시간을 건너뛰는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릭사엘과 거리적으로 멀어지거나 의식을 잃으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릭사엘과 거리적으로 멀어졌을 때 시간을 옮겨가는 건
당신이 빨려들어온 이 과거의 시간 흐름이 릭사엘을 중심으로 돌기 때문이겠지요.
젖은 흙 냄새 사이로 산등성이를 넘은 찬 바람이 스칩니다.
아무리 봐도 여름은 아닌 계절.
다그닥, 다그닥, 가까이 다가온 갈색 말의 발굽이
당신의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반사적으로 말에 탄 이의 짙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이 스칩니다.
당신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챈 이가 급히 고삐를 당기고
말이 다급한 고삐질에 투레 소리를 내며 멈춰섭니다.
그리고는 성난 말을 쓰다듬고는 급히 안장에서 내려
당신을 향해 달려오는군요.
여전히 어려진 당신보다 키가 큰 릭사엘이
반쯤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반쯤은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릭사엘:(헐레벌떡 달려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지만 가까스로 몸을 바로세우고는, 헥헥거리며 네 옆에 선다) 유, 유스텐? 유스텐 맞지?
대체... 대체 저번엔 왜 사라졌었어. 내가 얼마나 놀랐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이 갑자기 오기나 하고...!
유스텐:(넘어지려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다가 주먹을 쥐고선 반갑게 웃는다) 잠들기 직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컸네요?
릭사엘:그야, 헥...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까. 얼마나 지났더라, 9개월? 10개월? 어쨌든 그쯤 지났어. 한참 전이란 말이야...!
유스텐:'진짜 쑥쑥 크네... 아직 어려서 그런가. 195cm가 될 때까지 쭉 - 자란다는 말이지...?' (애 키우는 어머니 같은 눈으로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말했잖아요. 내 의지가 아니라고.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음... 아마 잠들 때처럼 의식을 잃거나, 당신에게서 거리가 멀어지면 9-10개월 뒤로 이동하는 것 같아요.
릭사엘:(네 말에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다가) ...그럼 딱 붙어 있어야 하는 거야? 그건 좀 곤란한데, 으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유스텐:(진짜 모른다는 듯이 눈을 깜빡깜빡거린다) 왜요? 어차피 다른 사람 눈엔 내가 안 보이잖아요.
릭사엘:그건 그런데... 씻을 때도 붙어 있는 거면 조금... 음...
(급하게 화제를 바꾸며)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참 별걸 다 생각했네. 가, 같이 말이라도 탈래? 타본 적 있어?
유스텐:버지니아에서 딱 한 번 타봤어요. '정확히는... 당신이 태워준 거지만.'
릭사엘:(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버지니아? 어... 거기 영국 아니지 않아? 네 발음이 이곳 발음과 달라서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아예 이방인인 줄은 몰랐어.
기껏해야 아일랜드 북부쪽이나... 그쯤인 줄 알았는데.
유스텐:(쿡쿡 웃으며) 하하! 내가 아일랜드 사람처럼 생겼어요?
릭사엘:어... 그건 아니지? 하지만 제국 외곽으로 가면 다양한 발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어. 물론 나는 그쪽 사람들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유스텐:미국인이에요. 부모님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거기서 태어난 건 맞으니까...
이방인이라는 말도 맞지 않나요? 난 이 시대 사람도 아닌걸요.
릭사엘:음... 맞네. 그랬지 참. 자꾸 까먹어. 내 앞에 이렇게 있는 너는 내게는 그저 이 시대에 실존하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 갑자기 사라질 때를 빼고 말이야... 전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내가 건네줬던 잠옷만 덩그러니 침대에 놓여 있더라고. 사람이 그대로 증발한 것처럼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미국에서 영국까지는 어떻게 온 거야? 눈 떠보니까 여기였던 거야, 그것도?
유스텐:으음 ...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당신 과거가 보고 싶어서 과거로 갈 수 있는 장치를 건드렸고, 그로 인해 눈 뜨고 보니 영국이었다는 말을... ... 믿을 리가 없지. 내가 사는 시대에 자긴 죽고 없을 때라 생각할 게 뻔하니까. ' 그런 셈이죠.
릭사엘:신기하네... 미래에는 신기한 기술이 많구나. 사람들은 미래에 불로불사의 약이 개발되어서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느니, 하늘을 새처럼 날 거라느니 하던데. 미래에서 과거로 오는 거면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닌가보네... 근데 왜 하필 나랑 떨어지면 시간을 건너뛰는 거지. 짚이는 거 없어?
보통은 접점이 있는 사이라야 그런 게 가능하지 않아?
유스텐:(뜨끔) '눈치 빠른 건 원래부터 빠른 거였구나...' 어... 그, 글쎄요.
릭사엘:(영 모르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으음, 내가 멋대로 넘겨짚는 것도 실례인데) 음... 모르겠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말에게 다가가 고삐를 당겨 네 앞으로 끌고 오고는, 말의 정수리와 뺨을 슥슥 쓸어내린다. 너를 돌아보며) 먼저 타. 내가 뒤에 탈게. 베스는 순한 말이니까 혹시나 낙상할까 걱정하지 말고.
유스텐:'말 이름이 베스구나. 그, 근데 어떻게 타지? 저번엔 릭스가 그냥 들어올려줬는데.' (머뭇거리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멋지게(?) 말 등을 두 손으로 짚고 올라타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삐질거리며 헛기침을 하고) ...말이 참 키가 크네요.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승마 해봤다고 하더니, 몇 번 안 해봤나 보네. (말을 쓰다듬던 행동을 거두고 네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붙잡는다) 올려줄게, 하나, 둘, 셋...!
릭사엘:
근력
기준치:60/30/12
굴림:52
판정결과:보통 성공
당신이 붙잡힌 허리에 놀라 살짝 버동거리면
릭사엘은 그저 키득키득 웃으며 당신을 말의 안장 위까지
섬세하게 내려둡니다.
아직 어린데도 힘이 제법 세네요.
말의 호흡을 따라 몸이 위아래로 살짝 흔들리는 것에 익숙해지려
어정쩡하게 등을 굽혀 손으로 짚고 있으면
릭사엘이 민첩하게 당신의 뒤에 올라타
당신을 뒤에서 끌어안고 고삐를 마저 쥡니다.
릭사엘:(고삐를 단단히 쥐며 네 어깨에 살짝 턱을 괴며) 괜찮아? 불편하진 않아?
유스텐:(힐긋) '많이 가까운 것 같은데... 이 때의 릭스는 원래 이렇게 아무에게나 친근함을 드러내나?' (버지니아에서 릭스와의 추억이 겹쳐지며 뺨이 살짝 달아오른다.) '정신 차려, 유스텐. 아직 어린 애한테 무슨 감정을 느끼는 거야.' ㄱ, 괜찮아요.
릭사엘:그래? 다행이다. 천천히 가자.
(고삐를 쥐고 말의 옆구리를 살짝 찬다)
바람이 잔디를 쓸며 지나갑니다.
펼쳐진 초원이 햇빛을 머금고, 풀잎마다 은빛 결이 반짝이는 것이 보입니다.
릭사엘이 지시하자 말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불어닥치는 초원의 바람이 당신들의 옷자락을 크게 부풀게 합니다.
등에서 닿아오는 몸이 벌써부터 제법 단단합니다.
이러니 자꾸 버지니아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거겠지요.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말발굽의 리듬은 조용하게 얽힙니다.
세상에 마치 둘만 존재하는 듯 평화롭네요.
릭사엘:(고삐를 쥔 채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며) 어때, 우리 베스 착한 말이지? 작년 생일 때 부모님께서 선물로 주셨어.
유스텐:'아... 릭스가 예전에 말을 선물받은 기억이 있다는 게 이때 받은 거구나.' 정말 얌전하네요. 그러고 보니, 이제 라틴어는 잘 하나요?
릭사엘:응, 저번에 그 일이 있었던 후로 가정교사와 의기투합해서 열심히 했거든. 이제 저번처럼 잘못 낭독할 일은 없어.
유스텐:못 본 사이에 키만 성장한 게 아니네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릭사엘:음, 요즘도 별다를 건 없지. 역사 공부하고, 성경 공부하고, 라틴어 공부하고, 펜싱 교습 받고... 가끔 성당에서 낭독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낯빛이 조금 안 좋아진다) ...근데 나는 괜찮은데, 요즘 성공회 입지가 많이 흔들려서... 아버지께서 심란하신가봐.
유스텐:그렇구나... (눈을 내리깔며) '하긴... 이 시기에 성공회가 흔들린다고 역사 시간에 얼핏 들은 것 같다. ... 다가올 미래를 알려줘봤자, 릭스에게 불안감만 심어주겠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릭사엘:(침착해진 목소리로) 최근에 가정교사에게, 우리 교회들에서 이단서적이라고 불리는 그 『종의 기원』이라는 책의 내용을 들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믿기지 않으면서도 납득하게 되는 구간이 있었어. 성직자 가문의 장남으로써 그런 이야기에 혹하는 것 자체가 불온한 일인데...
문득,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 생명체가 진화를 하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믿는 신은 창조주가 아니라 그저 관찰자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 아닐까.
우리 집안은 성직을 맡아서 보니까... 나도 밖에 나가면 종교 관련해서도 여러 소식을 듣거든? 그런데 개중엔 교회를 나가 이단 사상에 합류한 자들에게 분노해, 그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는 소식도 있었어. 그걸 듣고 난 신이 정말 실존한다면 왜 그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나 싶었고...
...미안, 이런 얘기 너무 무겁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이것저것 말하게 되네.
유스텐:(고개를 저으며)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잊어버린 거예요, 릭사엘? 나를 수호천사로 쳐주기로 했던 것 같은데 -
릭사엘:(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는 네 말투에 슬며시 웃으며) 그러네, 잠깐 깜빡했어. 유스텐은 나의 수호천사님이었지.
유스텐:... 당신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오래도록 사실이라고 믿었던 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한 거잖아요.
(고삐를 쥔 네 손등 위로 제 손을 살포시 올리며) 스스로의 생각을 믿어요, 릭사엘. 내가 아는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까요.
릭사엘:(손등에 닿는 온기에 시선을 살짝 내려, 두 손이 포개어진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지. 그런데 과연 내가 똑똑한 게 좋은 일일까...? 난 잘 모르겠어. 난 가문의 장자로써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뜻을 알리며 살아갈 사명이 있는데... 이렇게 의구심만 가득한 걸 보면 내가 우리 가문에 적합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종종 들어서.
요즘 제국에서 식민지 확장과 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군대와 사람들을 보내는데... 사람들은 그걸 '신의 뜻'이라고, 신의 이름을 알리는 일이라고 찬사하지만... 난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아. 그저 포교가 목적이었다면 왜 그 많은 군인들을 함께 배에 실어 보냈을까...
유스텐:(어떤 말을 해줘야 좋을지 한참이나 말을 고르다, 네 손등을 더욱 부드럽게 감싸쥔다) ...타인의 잣대로 스스로를 재단하려 하지 않아도 돼요, 릭사엘.
"가문에 적합한 사람" 이라는 게 꼭 종교적인 믿음의 크기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렇죠? 정말 그게 중요했다면, 성경 공부만을 시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난... 오히려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 당신이 그만큼 진지하게 신의 뜻을 고민하는 사람 같다고 생각해요.
릭사엘:(저를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네 모습에 가슴이 뭉근하게 따뜻해져서, 배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유스텐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게다가 똑똑하고 현명하고. 나중에 너랑 결혼할 배우자는 참 좋아하겠네.
유스텐:'당신이 내 배우자인데.' (네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들썩인다.) 그러게요.
말발굽이 풀잎 사이를 스치는 소리만이 경쾌하게 귀를 울립니다.
릭사엘은 평화로움을 만끽하듯 고개를 살짝 양옆으로 흔들며
달려오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 듯 눈을 감다가
이윽고 마저 배시시 웃으며 천천히 고삐를 당깁니다.
시야 끝에 부드러운 언덕과 얕은 개울줄기가 흐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빛이 물 위에서 조용히 부서지며, 잔잔하게 흘러내리고 있네요.
릭사엘:예전에 부모님이 나한테 승마 처음 가르쳐주셨을 때 데리고 와주신 곳이야. 예쁘지? 이제는 같이 와주시지 않지만, 나 혼자 종종 보러 와.
유스텐:와 - 정말 예뻐요...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버지는 바쁘실 거고...' 백작 부인께서는 요즘도 건강하신가요?
릭사엘:으음... 병세가 조금 악화되셔서 침대에만 계셔. 언제 나으시려나 모르겠어. 듣기로는 외가쪽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병이라는데, 듣자 하니 그런 유전병은 잠시 쾌차할 순 있어도 다시 증세가 악화되기를 반복한대.
유스텐:'이거 느낌이 쎄한데....' ... 어머니께 드릴 작은 선물이나 편지 같은 걸 준비해보는 거 어때요?
릭사엘:음... 그럴까? 그럼 오늘은 저녁에 잠시 외출해서 들꽃을 좀 따야겠다. 어머니께서는 꽃을 참 좋아하시거든, 내가 이름 모를 것을 따가도 꽃 이름을 다 아셔. 대단하지?
유스텐:대단하네요. 백작 부인께서도 릭사엘처럼 머리가 좋으신 분인 것 같아요.
릭사엘:(히죽히죽 웃으며) 그런가? 그런 걸지도. (네 말에 어깨가 조금 으쓱한다)
아...! 그러고보니 유스텐은 애칭이 뭐야? 유스?
유스텐:(끄덕) 네. 제가 정한 건 아닌데,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릭사엘:으음- 그렇구나. 그러면 나도 유스라고 불러도 돼?
유스텐:'묘하네... 어린 릭스에게도 애칭을 듣는다는 건.' 네, 물론이에요.
릭사엘:좋아! 유스. 유스. 유스-! (신나서 네 애칭을 잔뜩 부른다)
유스텐:하하, 그렇게 계속 부르면 아무리 저라도 민망하거든요 -
릭사엘:민망해? 그럼 너도 날 애칭으로 부르면 되지. 그 존댓말도 그만 치우고...!
유스텐:애칭에 반말까지 하라고...요? '현대의 릭스한테도 반말은 안 했는데...'
릭사엘:응! 이왕이면 편한 게 좋잖아.
유스텐:애칭은 괜찮은데, 으음 - 아무리 그래도 귀족한테 반말은 좀...
릭사엘:으음... 그래? 그렇다면 너 편한대로 해야지. 괜찮아, 존댓말 듣는 건 익숙하거든.
유스텐:그리고 나이로 따져도 릭스가 더 많잖아요.
릭사엘:으응? (네 말에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키득거리며) 태어난 연도순으로 따지기로 한 거야, 이젠? 전에는 그렇게 따지면 안 된다면서.
(헤실거리며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내 애칭이 릭스인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말해줬었어?
유스텐:'아차... 애칭으로 부르라길래 실수해버렸네.'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릭사엘:그래? 하긴, 내 이름도 유스 이름처럼 어려운 이름이라 애칭을 달리 짓기 어렵긴 하지. (별뜻 없이 생각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저 말을 개울 반대편으로 끈다) 아침 안 먹었지? 저택에 가면 뭐라도 차려달라고 할게. 고기 좋아해?
유스텐:(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좋아해요. 릭스는요?
릭사엘:(키득거리며) 당연히 좋아하지. 난 오리 고기 좋아해.
유스텐:'우와... 맨날 풀떼기만 먹는 릭스 입에서 "오리 고기"라는 소리가 나온다니.' 샐러드는 안 좋아해요?
릭사엘:(지레 뜨끔하며) 으음...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아.
(변명하듯 덧붙인다) 그래도 과일은 잘 먹어...! 채소가 좀 덜 좋을 뿐이지.
유스텐:그렇구나 -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당긴다) 우리 릭스 도련님은 채소를 싫어하시는구나 -
릭사엘:싫어하는 건 아니래도 자꾸... 나 놀리는 거지? 그러는 유스는 채소 얼마나 잘 먹길래.
유스텐:(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못 먹지는 않지만 세상에 맛있는 게 넘쳐나는데 굳이요?
릭사엘:나도 못 먹는다고는 안 했어- (입술을 삐쭉인다)
유스텐:하하, 삐졌어요?
릭사엘:...아니. 안 삐졌어어- (살짝 투덜거리면서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들썩여 몸을 조금 더 붙인다)
유스텐:다 티나는데 - '이렇게 말투랑 얼굴에 감정이 다 쓰여있는 릭스라니... 재밌다.'
릭사엘:흥... 나중에 두고 봐. 내가 더 많이 놀려줄 테다.
다그닥다그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개울 풍경이 멀어지고 초원 위로 황금빛이 내려앉습니다.
어느덧 안개가 거둬진 햇살 아래로 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집니다.
릭사엘은 고삐를 쥔 채 말을 천천히 몰며
멀리 보이는 석조 저택으로 향합니다.
담쟁이가 걸린 외벽에 햇살의 조각이 금실처럼 매달려 있고
웅장한 저택의 위용이 점차 가까이 다가옵니다.
곧 저택의 정문에 닿자 릭사엘이 먼저 말에서 풀쩍 뛰어내리고
당신의 작은 몸을 허리부터 끌어안아 내려줍니다.
닿아오는 손길이 놀라울 만큼 따뜻합니다.
릭사엘이 말에서 내린 뒤 고생했다며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면
곧 멀리서부터 달려온 하인이 달려와 말의 안장을 받습니다.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말을 데려가는 하인의 모습이
중세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 같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릭사엘은 이번에도 당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당신을 저택 안으로 이끕니다.
바깥과 달리 약간 서늘한 실내 공기가 스칩니다.
릭사엘:(신나서 복도를 건너가며) 아버지께서 런던에 출타중이셔서, 걱정 없이 아침 식사 들어도 될 거야. 사용인들에게 어머니가 다이닝룸에서 식사하시기로 했다고 거짓말하고, 식사 끝나고서 몸이 안 좋아서 안 내려오신 것 같다고 동일한 식사 올려보내달라고 할게.
어때, 완벽한 계획이지?
유스텐:(피식) 정말 완벽한 계획이네요. 릭스, 거짓말에 능숙한 것 같은데.
릭사엘:(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이왕이면 머리가 좋다고 해줘.
유스텐:'현대의 릭스와는 너무나도 딴판인 것 같은.... 아닌가? 현대에도 릭스는 뻔뻔하긴 했으니까.' (혼자서 쿡쿡 웃다가) 그래요. 똑똑한 릭스.
릭사엘의 경쾌한 발걸음이 복도를 가로질러
당신을 다이닝룸 안쪽으로 들입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식탁 위를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은제 식기와 도자기 그릇을 반짝 빛냅니다.
식사를 준비중이던 하인들이 릭사엘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하다가
릭사엘이 편히 식사하겠다고 축객령을 내리자
어린 아이 시선으로 보기엔 큰 식탁 가운데에
연기가 오르는 접시들이 여럿 놓여 있습니다.
릭사엘이 어머니와 식사하기로 했다고 계획된 거짓말을 하자
하인들은 군말 없이 식탁을 재정돈하고
식탁의 가장 상석 옆에 식기를 새로 놓아둡니다.
릭사엘이 축객령을 내리면 하인들은
곧 다이닝룸을 나가 복도에서 대기하는군요.
식탁 위를 가만히 바라보면 큰 식탁 가운데에
연기가 오르는 접시들이 여럿 놓여 있습니다.
프라이드 에그 위에는 버터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얇게 썬 베이컨이 바삭한 향을 퍼뜨립니다.
곁에는 구운 토마토와 버섯 볶음이 가지런히 놓여 있네요.
훈제 청어의 짙은 향이 실내에 은근히 퍼져,
식욕과 동시에 묘한 정적을 만들어냅니다.
릭사엘:(상석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 너를 예의바르게 앉히며) 식사 예절은 알아? 모르더라도 괜찮아. 편하게 들어.
유스텐:(어색하게 앉으며) 으응, 고마워요. (네가 먼저 식사를 들 때까지 기다린다)
릭사엘:(맞은편에 부드럽게 착석하며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올리고, 전채용으로 나온 버섯볶음부터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먹기 시작한다)
유스텐:(그간 릭스가 식사하는 걸 봐왔어서, 어정쩡하게 식사 예절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식기 부딪치는 소리를 조금씩 내지만 야금야금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이 ‘탁’ 하고 작은 소리를 냅니다.
방 안의 공기는 고요하고,
칼날이 접시에 닿는 소리, 잔이 놓이는 미세한 진동만이 공간을 흔듭니다.
릭사엘은 한참이나 묵묵히 식사를 하다가
당신이 야금야금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은제 찻주전자를 살짝 들어 잔에 맑게 우린 백차를 따르고
당신의 앞으로 가지런하게 놓아줍니다.
릭사엘:(부드럽게 웃으며) 잘 먹네. 입에 맞아? 고기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베이컨 더 내오라고 할까?
유스텐:'윽... 이거 백차잖아. 아무 맛도 안 나는.' ...맛있어요. 지금 먹는 걸로도 충분해요. (백차를 빤히 보다가 숨을 한 번 내쉬고 천천히 들이킨다) '이 시대에는 설탕이 귀하니까 차마 있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릭사엘:그래? 다행이다. 많이 먹어. (네가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안심해, 저도 마저 식사한다)
유스텐:(겨우겨우 백차를 반 정도 마시고서 살짝 내려놓는다.) ...아까 배우자 얘기가 나왔어서 궁금해진 건데, 릭스는 약혼자 있어요? 보통 이 시대 귀족 가문들은 어릴 때부터 미리 정해놓는다고 들었어서.
릭사엘:음? 약혼자? 그런 거 없어.
유스텐:(저도 모르게 표정이 밝아지며) 그래요? 으음... 그래도 귀족 자제분들끼리 교류를 자주 할 것 같은데. (힐끔거리며 네 반응을 떠본다)
릭사엘:음... 지금은 없기는 하지만, 만약에 부모님께서 약혼자를 정해주시면 하기는 하겠지? 가문을 이어야 하니까. (너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딱히 관심 가는 사람도 없거든.
아, 아무도 없다고 하기엔 그렇구나. (너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키득거린다)
유스텐:(갑작스런 돌직구에 눈을 크게 뜬다. 스스로를 가리키며) 네? 저, 저요?
릭사엘:응, 난 네가 제일 궁금하거든. 첫 친구라서도 그렇고 여러모로.
유스텐:(슬쩍) ... 전 그냥 평범한 미국인인데요. 가진 것도 없고.
릭사엘:그렇지만 내가 본 사람 중에 네가 제일 흥미로운 사람은 맞는걸? 게다가 여기 영국이잖아, 미국인을 볼 확률이 몇이나 되겠어. (방긋거린다)
유스텐:그건... 그렇죠. 왜요? 제가 보기 힘든 미국인에, 시간여행자라서?
릭사엘:음... 그것도 없다고는 못하지?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못 보고 나만 볼 수 있는 친구라니, 환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 수호천사니 뭐니 하는 것도 재밌고.
그리고 유스는 예뻐. 요정 같아. 보면 좋아.
유스텐:(마지막 말에 제대로 굳어버려서 눈만 깜빡이다가 시선을 내리깔고 볼을 붉힌다.) ... ... 뭐예요, 그게... '이 사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내 착각인가? 귀족들은 친구끼리 이러나?'
릭사엘:으응? (네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전에 얘기를 한 번도 안 했어? 생각은 늘 그렇게 했는데.
유스텐:(무릎 위에 주먹 쥔 손을 올린 채 꼼지락거린다) ... 저 남자인 건 알죠?
릭사엘:응? 알지. 그건 갑자기 왜?
유스텐:남자한테 예쁘다느니 요정 같다느니... 그러는 릭스도 마찬가지거든요?
릭사엘:응, 나도 알지. (여전히 방긋거리며) 왜 그렇게 당황했어. 내가 이런 말 한 게 놀라워?
유스텐:(툴툴) 누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놀란다고요... '어릴 때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네, 릭스는...'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나 뒤늦게 잠깐 생각했는데, 유스가 나보다 키도 작고 어린데 나한테 요정이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유스텐:요, 요정도 요정 나름인 거 몰라요? 나이 든 요정도 있고, 키 큰 요정, 키 작은 요정도 있을 걸요?!
릭사엘:(다급한 듯 말까지 더듬는 네가 귀여워서, 그저 쿡쿡 웃는다) 아무리 그래도 보통은 작은 쪽을 요정이라고 하잖아. 날 요정 취급하고 싶어? 꼬마 유스.
유스텐:("꼬마 유스"라는 말에 발끈하며) 꼬마 아니거든요! '정신은 이미 어른이라고!'
릭사엘:꼬마지. 너랑 내 나이 차이가, 어디 보자... (가볍게 2002에서 1858을 빼며) 144년이나 나는데?
우리 유스- 내 기준으로 따지면 어제 갓 태어났는걸?
유스텐:... 치사해요.
릭사엘:(키득키득) 치사해?
치사해도 어쩌겠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유스텐:치사하고 너무해요.
릭사엘:그 정도야? 그럼 유스는 뭐라고 불러주길 바라는데?
유스텐:... 키 크고 똑똑하신 유스 님이요.
릭사엘:에이, 키 큰 건 아니다 솔직히.
유스텐:제가 아직 이렇게 작아도 180cm 에 근접할 정도로 커질 예정이거든요?!
릭사엘:(키득키득) 그래 그래, 힘내. 180도 넘고 190도 넘고 2미터도 넘어봐.
유스텐:(삐쭉) 자꾸 그러면 밥 먹고 확 가버릴 거예요.
릭사엘:... (키득거리며 웃던 얼굴에 조금씩 웃음이 걷히며 차분해진다) ...가고 싶어?
너무하네. 나 지금 너 만나려고 몇 년 기다렸는지 알잖아.
유스텐:(고개를 들어올리며) 날... 기다렸어요?
릭사엘:...그러니까 말을 타고 달리던 중에도 널 보고 멈췄지. 달리는 말 위에서의 시야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 유스는 모르는구나. (아련한 기색으로 웃는다)
유스텐:(입술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 농담이었어요. 가버릴 거라는 말.
릭사엘:응... 홧김에 한 말인 거 알지. 그러니까 진짜로 화를 내지는 않는 거잖아.
유스텐:당신도 참 이상해요. 9개월에 한 번씩 예고도 없이 오는 사람을 기다리다니.
릭사엘:...그런가, 그럴지도. 근데 안 보면 자꾸 생각이 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되던걸.
그래도 얼마만에 다시 나타나는지 간격은 알았으니까, 다음에 기다릴 때는 조금 더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겠어.
유스텐:이번이 겨우 세 번째 만남인데...
릭사엘:... 그러게, 네 말마따나 횟수로 따지면 겨우 세 번째인데, 없으면 뭐하고 있을까 생각이 나고, 연락을 해보고 싶고, 그러더라고.
유스텐:(미간을 찌푸리고 웃으며) 뭐예요, 그게 - 바보 같아... '예나 지금이나...'
릭사엘:(배시시 웃으며) 더 자주 오는 방법은, 없겠지? 있으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테니까.
유스텐:... 미안해요.
릭사엘:으응... 아니야. 미안할 게 뭐 있어. 미래에서 과거로 오는 게 쉬운 일도 아닐 테고... 나야 이곳 사람이니까 모르지만 그 시대쯤 되면 지금보다 다들 바쁘게 살겠지.
유스텐:... (씁쓸하게 미소짓는다) 그렇죠.
릭사엘:(네 앞으로 백차를 한 잔 더 따라주며)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난 괜찮아. 나도 요즘은 제법 바쁘게 살거든, 유스가 다음에 올 때는 같이 못 놀지도 몰라.
유스텐:'으윽... 또 리필해줬잖아...' (예의상 한 모금 마시고는) 같이 못 노는 건 예상 못했는데... 그럼 그냥 가요?
릭사엘:...그건, 싫지.
유스텐:그러면 조용히 구경하는 건 해도 돼요?
릭사엘: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내가 배우는 내용이 유스 듣기에 흥미롭진 않을 텐데, 괜찮아?
유스텐:괜찮아요. 어차피 당신 보려고 오는 건데 뭐. 공부를 방해할 수는 없잖아요.
릭사엘:어... (네 말에 살짝 설레서) 나... 보려고 오는 거라고?
왜?
유스텐:응? 아... (슬쩍) '또 말실수를 해버렸네.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고 설명할 순 없으니까...' 저, 저도... 릭스 얼굴 보는 게 좋아서,요...?
릭사엘:(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로) ...내 얼굴 보는 게 좋아?
유스텐:네, 귀엽잖아요.
릭사엘:(예상 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윽고 크게 웃어버린다) 아하하...! 귀여운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해-
유스텐:그럼 둘 다 귀여운 걸로 치는 거는요?
릭사엘:(키득키득) 그거 좋네.
릭사엘의 웃는 소리와 함께 식사가 천천히 마무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비치는 햇살은 따스하기 그지 없고
식어내린 음식에서는 여전히 정겨운 향기가 풍기지만
배가 부른데 정겨운 아침 식사를 더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식사가 끝나자 릭사엘은 가볍게 식후 기도를 읊고는
당신의 식기를 제 식기와 겹쳐 얹고는
종을 흔들어 하인을 다시금 들여옵니다.
사용한 식기가 두 종류인 것이 혹여 들킬까 싶었는지
태연하게 하인에게 식사 중 식기를 모두 떨어뜨려 반대편의 것을 썼다고 둘러대는 것까지
아주 교묘하고 계획적이네요.
곧 어머니의 방으로 식사를 올려보내라고 명령한 릭사엘이
당신에게 슬금슬금 눈치를 주며 나가자고 눈짓합니다.
당신은 릭사엘을 따라 복도로 나오고
경쾌함 속에 실린 단정한 발걸음과 함께
메인 홀 옆의 커다란 방으로 들어옵니다.
아무래도 거실 같군요.
릭사엘이 당신에게 소파를 가리켜 당신이 엉덩이를 붙이면
릭사엘이 가만히 옆자리에 앉아 나른한 고개를 당신쪽으로 기울입니다.
릭사엘:(눈을 감은 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 소리를 내며) 흐음- 이제 뭘 해야 좋을까. 하고 싶은 거 있어, 유스?
유스텐:하고 싶은 거... '무작정 릭스의 과거를 보고 싶어서 온 거지, 뭘 하고 싶다는 계획을 안 세워둬서 모르겠다...' 바쁘게 지낸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랑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예요?
릭사엘:가정교사 방문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괜찮아. 하고 싶은 걸 해도 돼.
유스텐:음 - 나한테 궁금했던 걸 물어보는 건 어때요?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했잖아요.
릭사엘:음, 그럴까? 그거 좋겠다...!
있지, 그럼 미래에는 사람들이 다 너처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거야? 얼마나 과거까지 갈 수 있어?
유스텐:(삐질...) 다는 아니고 제가 음... 금단의? 장치를 우연히 얻은 거라.
릭사엘:금단의 장치?? 그러면 모두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아닌 거야? 유스는 그걸 어떻게 얻었어?
유스텐:(삐질삐질...) 어... 우, 우연히? 길 가다 줏었어요.
릭사엘:그래? 유스 운이 좋은 편인가 보네... 그런데 그게 금단의 장치인 건 어떻게 알았어? 무슨, 나쁜 사람들만 사용하고 그러는 물건인 거야?
아니지, 참. 이곳에 온 게 우연이라고 했으니까 운이 좋다고 보기엔 어렵나? 으음- (진지하게 고민한다)
유스텐:'또 거짓말 해버렸다... 그치만 이걸 어떻게 솔직하게 말해? 남편의 과거가 보고 싶어서 사이비랑 거래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으음 - 우, 우리 다른 질문으로 넘어갈까요?
릭사엘:음- 말하기 곤란한 거구나? 그래! 그러면 유스는 미래에선 어떻게 살았어?
유스텐:'윽...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 거지?' 그, 그러니까 - 부모님이 안 계셔서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릭사엘:그래...? 힘들었겠다... 그럼 지금도 계속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던 거야?
유스텐:(제 모습이 어려진 것도 생각 안 하고 줄줄이 말한다) 그건 아니고, 18살에 나와서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2-3개씩 뛰면서 지냈죠? ... 사회에 나가보니까, 돈도 없고, 부모님도 없는데 외모가 예쁘장한 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더라고요. 오히려 갖고 놀기 좋은 만만한 대상이 되지.
릭사엘:... (열, 열여덟 살? 당황하지만 일단은 공감해주고 본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사람들이 왜 그럴까. 안 그래도 힘든 사람한테 더 힘든 일이나 주고.
유스텐:(씁쓸한 표정으로) 건드려도 보호해 줄 울타리 같은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얼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일도 사람 마주치지 않는 것만 골라서 했고.
릭사엘: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어... (네가 미래에서 몇 살쯤 되는지 자각하니 어쩐지 당황스럽지만, 작은 손으로 네 작은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어주며) ...고생 많았겠네, 그래서 자기 얼굴을 좋아하지 않게 됐구나. 이해해. 일자리까지 사람 마주치지 않는 걸 골라야 했다면 선택지도 적어서 더 힘들었겠어. 혼자 마음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가끔은 정말 우울하기도 했겠다.
유스텐:(살면서 처음으로 이해받는 기분이 들자 갑자기 감정이 폭발한다.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아이 씨... 여기서 울면 안되는데. 왜 이러지... 나 지금 어린 애한테 위로받고 우는 놈 된 거야?' ...이제는 괜찮아요.
릭사엘:괜찮기는, 이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네 몸을 꼭 끌어안고 아이 달래듯 토닥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우리 유스, 정말 열심히 살았네. 힘든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잘 살았어. 대단해. 대견하고. 그렇게 힘든 일이 수없었는데도 이렇게 바른 사람으로 남아준 것 자체가 네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증명해.
유스텐:'왜 이렇게 다정하고 난리야...' (결국 참던 눈물이 한 방울 무릎 위로 떨어지더니, 툭 투둑 쉴새없이 쏟아진다)
릭사엘:(부스스 웃으며 네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귀에 대고) 쉿... 괜찮아. 괜찮아.
유스텐:(훌쩍) 나보다 어리면서...
릭사엘:(눈물바다면서도 투덜거리는 네 모습이 귀여워서 키득거리며) 지금은 어린 애시거든요?
유스텐:(코찔찔이가 다 되어서는 눈을 반쯤 구기며 노려본다) 정신은 너보다 어른이거든요...
릭사엘:(네 등을 가지런히 쓸어내려주다가, 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상냥하게 닦아준다) 말해주지 않았을 때는 전혀 몰랐는걸? 사실은 어린 애처럼 굴고 싶었던 건 아니야?
유스텐:... '릭스 과거 보러 왔다가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민망해져서 고개를 푹 숙인다)
릭사엘:(대놓고 어린 아이 취급하며 네 양뺨에 손바닥을 대고는 조물거린다) 옳지, 옳지. 우리 유스, 코찔찔이가 다 됐네. 그만 울자.
유스텐:(삐 -----쭉) 어린 애 취급하지 마요.
자기도 어린 애면서...
릭사엘:지금은 어린 애여도 되니까, 어린 애로 지내.
(피식) 그 말도 맞지. 아, 얼른 커야겠어. 유스에게 어린 애라는 소리를 안 들으려면.
유스텐:뭐라는 거야, 진짜...
릭사엘:헛소리?
유스텐:(헛소리를 하는 게 웃겨서 눈가가 젖은 채 픽 - 하고 웃는다) 이상한 사람이야.
릭사엘:마음대로 불러, 이방인 유스.
아, 나이 알았으니까 존댓말해줄까?
유스텐:됐거든요 -
릭사엘:(투정 부리는 듯한 네 입술에서 어쩐지 시선을 떼지 못하겠어서, 의도적으로 눈동자를 올려 네 눈을 바라본다) ...정말 고집이 세네.
유스텐:누구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릭사엘:(피식) 지금 내 얘기 하는 거야?
유스텐:(끄덕)
릭사엘:네 앞에서 무언가를 고집 부리는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
유스텐:보면 알아요!
릭사엘:뭘 보면 안다는 거야? (키득키득)
유스텐:첫 만남 때부터 의사한테서 도망치고 있었잖아요. 피 뽑는 거 싫다는 이유로.
릭사엘:그거야, 아버지께서 내 건강을 과하게 염려하시는 게 문제지. 나 매달 진찰을 받는단 말이야. 그건 누가 봐도 과해.
유스텐:그래서 매달 그렇게 사방을 뛰어다닌 거예요?
릭사엘:매달 뛰어다닌 건 아니고, 가끔은 잡혀드리지.
아버지께서 예전엔 이렇게까지 내 건강을 염려하시진 않았는데,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고 나서는 나를 잃을 것이 두려우셨는지 과하게 걱정하셔. 아무래도 어머니의 병환이 유전적 소인인지라 그렇겠지. 하지만 난 건강하잖아? 의원에게 진찰을 받을 필요는 아직까지 없다고 봐도 되는걸.
아무래도 내가 의원 피해서 도망다니다가 조우한 첫 만남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나 보네, 우리 꼬마 유스는.
유스텐:아무래도 그렇죠. ...그리고 꼬마 유스라는 건 언제까지 부를 거예요?!
릭사엘:꼬마 유스가 어른 유스가 될 때까지.
유스텐:'현대에도 나를 어린 애 취급하던데.' ... 자꾸 그러면 저도 꼬마 릭스라고 부를 거예요.
릭사엘:내 키가 지금 너보다 훨씬 큰데도? 꼬마라는 말을 붙여도 돼?
유스텐:당연하죠. 나이는 꼬마가 맞으니까!
릭사엘:(너를 품안에 쏙 끌어당겨 안으며) 내가 안으면 네가 이 정도로 쏙 들어오는데?
유스텐:무, 무슨... '깜빡이도 없어, 이 사람은... 진짜 모르고 이러는 건가?' (안긴 채 바둥거리며) 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너를 품에서 떨어뜨린다) 좋아. 꼬마 유스. 앞으로도 꼬마라고 부른다?
유스텐:... 하아, 마음대로 해요.
릭사엘:(우느라 달아오른 네 양뺨에 손바닥을 대고 가볍게 열을 식혀주며)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맞다, 우느라 기운 빠졌지? 물 가져다 줄게.
유스텐:으응...
릭사엘이 가볍게 당신의 눈가와 이마를 쓸어주고는
잠시 드러난 눈썹 사이를 가만 바라보다가
어린 아이에게 하듯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일어섭니다.
앉아서 본 릭사엘이, 어린 아이임에도 크게 느껴지는 건
어렸을 때에도 키가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모르겠네요.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만히 정신이 훅 빨려나갑니다.
아, 맞다.
멀어지면...
.
.
.
빛이 번지는 듯 희미하던 시야에
창백한 세상에 당신을 덮칩니다.
코끝이 아려올 정도로 차디찬 겨울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지고
귀끝이 얼얼하게 시려오는 겨울.
당신은 살짝 어지러운 고개를 바로 세우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낯선 풍경이지만, 보이는 건물은 분명
릭사엘이 사는 저택입니다.
벤치며 나무며 모두 눈 속에 반쯤 파묻혀 있고
바람과 눈송이의 낙하음만이 들려오지만 말이지요.
그때,
쉭-!
멀리서 금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허공을 날카롭게 찢어내는 소리와 함께
눈보라 속에서 은빛 선이 반짝이네요.
하얀 눈발과 대비된 남색 머리카락이 고요하게 흩날립니다.
한 손에 펜싱 소드를 들고,
숨을 고르며 정제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네요.
멀리서 보는 것이지만, 이전보다 더 성장한 듯한 모습입니다.
검선이 휘둘릴 때마다 머리칼이 바람을 맞아 흩날리고
깃털같은 눈송이들이 검 끝에 닿았다가 부서집니다.
얼음의 잔향이 공기 속에서 은가루처럼 흩어지는 착각이 드네요.
숨결이 희미하게 피어올라 차가운 바람에 스러집니다.
당신은 그런 릭사엘에게 조금씩 걸음을 떼어 다가갑니다.
집중한 듯한 그의 자세는 겨울 외투가 죄다 여며져 있음에도
움직임이 자유롭고 매끈합니다.
유스텐:(방금 만났음에도 사뭇 달라진 네 모습에 오랜만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부드럽게 웃으며 ) 릭사엘.
쉭-!
마지막 일격이 허공을 가르기 무섭게
릭사엘이 헐떡이는 듯 상기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그의 어깨 위로 눈송이 하나가 떨어져 녹아내리고
릭사엘의 얼굴에 그리워하던 이를 다시 만난 듯한 부드러운 웃음이 핍니다.
릭사엘:(천천히 검을 아래로 젖히며) ...왔네. 이때쯤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어.
유스텐:그러게요. 전에는 추측만 하고, 확신은 없었는데. 정말로 텀이 9개월인가봐요. (검 끝을 흘끔 내려다보며) 많이 바빠졌어요?
릭사엘:아니, 그렇진 않았어.
펜싱 검을 설원 위에 대충 툭 떨어뜨린 릭사엘이
반가운 걸음으로 달려와 당신의 몸을 푹 껴안습니다.
겨울 바람을 맞아 차가운 모피와 가죽 외투 위로
천천히 체온이 번집니다.
릭사엘:(실없이 웃으며) 유스는 여전히 작네? 언제 커?
유스텐:(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글쎄요. 못 먹고 자라서.
릭사엘:(농담인 걸 아는데도 네 그런 말을 들으니, 저번에 들은 사연과 겹쳐져 목소리가 조금 잠긴다) 잘 먹고 많이 커야지. 아직도 품에 쏙 들어오잖아- (타박하듯 말하면서도 네 어깨에 얼굴을 묻고 히죽거린다)
유스텐:품에 쏙 들어오는 걸 즐기는 것 같은데 - 기분 탓인가.
릭사엘:에이, 원래 인형도 동물도 품에 쏙 들어와서 좋은 거라고. 유스는 뭘 모르네.
유스텐:난 인형도 동물도 아닌데도요?
릭사엘:귀여운 건 똑같지?
유스텐:농담도 - . (두 팔로 너를 마주안으며) 그동안 잘 지냈어요?
릭사엘:잘 지냈지. ...네가 보고 싶었던 걸 빼면.
유스텐:... 나 같은 건 쉽게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네 어깨에 턱을 기대며) 나 감동받았어요, 릭스.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겨우 이런 걸로 감동이야? 실없어. (네 등을 살며시 토닥거리다가 고개를 다시금 뗀다) 네가 올 줄 알았으면 춥게 밖에 나와있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네. 들어갈까? 따뜻하게 차 한 잔 줄게.
유스텐:펜싱 연습하는 거 아니었어요? 딱히 춥진 않은데.
릭사엘:아니야, 마침 들어가려던 참이었거든. 아무리 내가 추위를 덜 탄다지만, 이 추위에 몇 시간이고 펜싱 연습을 할 수는 없는걸?
유스텐:내가 타이밍을 잘 맞췄네요. 그리고 으음... (슬쩍) 차 말고 코코아로 주면 안 돼요?
릭사엘:차 말고 코코아로? 그래. 들어가면서 시종에게 부탁하면 방까지 가져다줄 거야.
유스텐:으응 - 고마워요.
릭사엘:(부드럽게 웃으며) 유스는 단 걸 좋아했구나. 어린 아이 같네. 기억해둘게.
유스텐:어린 아이의 기준이 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어른도 단 걸 좋아할 수 있거든요 -
릭사엘:그래, 그래. 알았어, 꼬마 유스-
릭사엘은 조용히 품에서 가죽 장갑 한 켤레를 꺼내고는
당신의 손에 꼼꼼히 끼워준 뒤
당신을 저택까지 안내합니다.
어느덧 이 저택의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익숙하네요.
웅장한 메인 홀을 지나쳐 계단을 오르고
이전에 와 보았던 3층까지 올라가면
릭사엘이 주저 없이 침실 문을 달칵 엽니다.
타닥, 타닥.
장작이 가득 들어간 벽난로에서 불꽃이 아늑하게 타오르고
기분 좋은 샌달우드 향기가 당신을 반깁니다.
창문에 낀 서리는 겨울임을 확실히 대변하지만
따뜻한 온도 덕에 순식간에 몸이 녹아내리네요.
릭사엘은 당신을 침대에 앉힌 뒤
설렁줄을 당겨 시종을 부르고는
달콤한 코코아 한 잔과 가볍게 즐길 다과를 부탁하고
당신이 앉은 옆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습니다.
앉은 상태임에도 이제 릭사엘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조금 더 들어야하네요.
릭사엘:(네 코끝에 살짝 제 검지를 가져다대며) 안 춥다고 하더니, 코가 새빨갛네. 누가 보면 화롯불에 익힌 줄 알겠어.
유스텐:(살풋 웃으며 너를 따라 네 코끝에 검지를 갖다댄다) 릭스도 마찬가지거든요?
릭사엘:그래? (손을 거두어 제 코끝을 톡톡 만져보며) 차갑긴 하네. 겨울이긴 겨울이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유스텐:어... '바로 이동한 거라 이제 말할 게 없는데.' 그냥, 늘 똑같죠 뭐. 릭스는요?
릭사엘:음, 딱히 별다른 건 없어. 공부하는 것도 똑같고, 교습 받는 것도 똑같고... (까지 말하다가 슬쩍 네 시선을 피하며) 달라진 거라면 아버지께서 과목을 늘리셨다는 것... 정도...랄까.
유스텐:많이 바빠졌네요. 새로 배우는 것들은 어때요?
릭사엘:어... 음... (얼굴이 조금 빨갛게 달아오르며) 배, 배울 만 해...
유스텐:'반응이 왜 저러지?'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바쁘긴 해도 듣기 싫은 과목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릭사엘:으, 응... 요즘엔 고전 문학이랑 수사학이랑 그리스어랑... 어... (시선을 피하며) 이, 이것저것 더 배우고 있어.
유스텐:(키득거리며) 으 - 듣기만 해도 완전 어려울 것 같아요. 귀족 가문의 도련님으로 살기란 엄청 힘든 거구나.
릭사엘:(얼굴이 붉어진 채로) 아무래도 그렇...지. 받아들이기 곤란한 걸 배워야하는 것도 힘든 점이야...
유스텐:응? 받아들이기 곤란한 거요?
릭사엘:앗... 그, 그게... 음... (눈동자를 정처없이 굴리다가) 요즘 성교육...을 같이 받고 있어서.
유스텐:아. ... '맞다... 릭스가 분명 예전에 그랬엇지. 어린 시절 기억은 없는데, 배운 것들만 기억한다고... 그래서 성지식을 안다고...' 하하, 하...! 가문을 이으려면 주, 중요한 과목이긴 하죠. 결혼도 하고 후계자도 있어야 하고... 음... (네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작게 침음한다)
릭사엘:음... (너를 힐끔 바라보며) 솔직히 내 나이에 배우긴 좀 이른 것 같지만 말이야... 곧 신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아버지께서 걱정이 많은가 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유스텐:백작님도 참 걱정이 많으시네요. 으응.... 시, 신학교에 가면 이제 더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겠네요.
릭사엘:음... 그러려나?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 그때라고 자유 시간이 아예 없진 않겠지.
그보다는... 네가 날 만나러 올 때를 보면, 장소 상관 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으니까... 신학교 들어간 뒤에 널 아예 못 만나면 어떡하나 싶긴 해. 그건 싫은데...
유스텐:음 - 매번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하니까, 뭔가를 남기고 가는 게 좋겠네요. '근데 뭘 남기지? 주머니에 들은 것도 없고...' (검지를 피고 턱에 댄 채 말없이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아! 혹시 칼이나 가위 있어요?
릭사엘:어, 어...? 갑자기 그건 왜? 있기야 있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책상 위로 다가가 서랍을 열고 뒤진다)
유스텐:지금 바로 줄 수 있는 게 떠올랐거든요. 어서 -
릭사엘:음... 그래. (서랍을 한참 뒤지다가 가위를 꺼내어 네 옆으로 돌아와 내민다) 근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하려고?
유스텐:(가위를 건네받고 예고도 없이 고개를 살짝 틀어 목을 덮는 뒷머리를 자르려 한다)
유스텐:
손놀림
기준치:60/30/12
굴림:62
판정결과:실패
(GM):
싹둑싹둑,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잘라내자 살짝 허전한 감각과 함께
한 줌도 채 되지 못하는 가닥들이 손바닥에 모입니다.
릭사엘은 당신이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광경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다가
가만히 벌어진 입술을 떱니다.
유스텐:(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별 생각없이 네게 내밀며) 당장 가진 게 이것뿐이라서요. 끈으로 묶어두면 될 거예요. ...미리 말하지만 제 머리 깨끗해요.
릭사엘:(손끝을 달달 떨며 네가 내미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받아들고는, 얼굴이 황망하게 달아오른 채로) 내가... 내가 정말 이걸 받아도 돼...?
유스텐:응, 머리카락은 시간 지나면 또 자라는 거기도 하고....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걸 보면, 좀 괜찮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릭사엘:(머리카락이 사랑 고백 내지는 헌신의 증표처럼 여겨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늠할 수 없는 네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에 네 머리카락을 꼭 쥐고는) ...고마워, 유스. 항상 잘 보관할게...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유스텐:'아무리 줄 게 없어도 그렇지. 머리카락 주는 건 좀 오바였나.' 으음 - 선물로 이런 걸 줘도 되나 싶긴 한데... 미안해요.
릭사엘:아, 아니야.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나 지금 정말 기뻐. (손에 머리카락을 꼭 쥔 채 너를 가득 끌어안는다)
유스텐:(깜빡- 깜빡-) 진짜 그런 걸 받아도 괜찮아요?
릭사엘:(피식피식 웃으며) 당연하지. 물론이지.
(머리카락을 주는 것의 의미가 지극한 애정표현으로 통한다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네가 선물을 무를세라 입을 꾹 다물고는, 네 어깨에 고개를 비빈다)
유스텐:(얼떨떨-) '생각보다 엄청 좋아하네.' 혹시 9개월 사이에 잃어버리면 말해요. 또 줄게요. 아, 아니지... 제대로 된 선물을 줘야 하나...
릭사엘:아니야, 난 이걸로 충분해. ...펜던트 목걸이에 넣어서 가지고 다닐게.
유스텐:(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그걸 펜던트에 넣고 다녀요?
릭사엘:응, 안 돼? 그렇게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
유스텐:아니... 안 될 건 없죠. 이제 릭스 거니까... '굳이?'
릭사엘:(해사하게 웃으며 손에 쥐여진 머리카락에 살짝 뺨을 비빈다) 그치. 이제 내 거야. 못 물러.
유스텐:'뺨에 비비기까지...?' 그, 그래요...
당신이 당황하며 얼떨떨하게 릭사엘을 바라보고 있으면
릭사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얼굴로 배시시 웃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함이 묻어나는 미소에
무어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네요.
똑똑,
그러던 중 정직하게도 문은 노크 소리를 내보냅니다.
릭사엘이 얼굴에 가득 떠오른 미소를 갈무리하고 들어오라고 지시하자
시종이 차분하게 은 쟁반을 들고 침실로 들어와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가만히 음식을 내려놓습니다.
코코아의 단내가 모닥불의 내음와 섞여 묘하게 따뜻한 향기를 만듭니다.
시종이 내려놓는 도자기 접시 위에는 갓 구운 마들렌이 반달 모양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고,
옆에는 작은 과일 타르트와 버터 쿠키가 정갈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시종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나며 문을 닫습니다.
남은 건 당신들 두 사람뿐이네요.
창밖에서는 눈이 여전히 흩날리고,
벽난로 불빛이 코코아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나란히 비춥니다.
릭사엘:(가만히 너를 끌어당겨 테이블 앞 의자에 앉히며,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내민다) 어서 먹어봐. 먹고 싶다고 했잖아.
유스텐:'와... 이 시대에도 이런 위대한 게 있다니...' (머그잔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한 모금 마신다. 만족스럽게 눈을 감으며) 아... 좋다.
릭사엘:(코코아를 음미하는 네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네가 선물한 머리카락을 올려두고 그제서야 두껍게 입고 있던 외투를 벗는다) 부족하면 말해. 더 가져다달라고 할게.
유스텐:(도리도리) 한 잔이면 충분해요. 여기 맛있는 쿠키랑 타르트도 있는걸요?
릭사엘:그래? 그럼 다행이고. 많이 먹어. (답답한 셔츠 소매와 단추를 살짝 풀어내며 네 앞 의자에 앉는다)
유스텐:(어떤 디저트부터 먹을지 고민하다 버터 쿠키를 하나 집어먹는다.) 음- '맛있어... 과거로 와서 처음 먹는 디저트 아닌가?' (과거에 온 이후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오물거린다)
릭사엘:(가만히 테이블에 턱을 괴고 네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다람쥐 같아... 아니 토끼인가? 어쨌든 그게 그거지만.)
유스텐:(야무지게 음미하다가 콕콕 쑤셔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한 시선에 눈을 뜬다.) 릭스는 안 먹어요? 맛있는데. '맨날 먹을 수 있는 게 디저트라 그런가.'
릭사엘:(입꼬리를 당겨 살짝 웃으며) 단 건 그렇게 많이 먹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맛있게 먹는 널 보는 게 즐거워서.
유스텐:아... '단 걸 별로 안 먹는 건 어릴 때부터였군. 또 하나 알았다.' 그치만 혼자 다 먹기엔 양이 너무 많은데, 하나만 먹어봐요, 응? 주방장님은 소백작님 드시는 거라고 열심히 만들어주셨을 거라고요. (과일 타르트를 하나 집어 네 입가에 내민다) 어서요 -
릭사엘:(입가로 내밀어지는 디저트에 살짝 당황하지만, 네가 먹여주려 한다는 사실에 슬금슬금 설렘이 몰려와서) ...그럼 이것만 먹을게. (차마 네게서 받아먹지는 못하고, 네가 내민 타르트를 손으로 건네받아 먹는다)
유스텐:(두 손으로 턱을 괴며 기대감에 찬 눈을 반짝인다) 어때요?
릭사엘:(반짝거리는 네 눈동자를 받다가, 하릴없이 생긋 웃으며) ...많이 안 달아. 맛있네.
유스텐:(초롱초롱) 더 먹고 싶어지지 않아요?
릭사엘:(아 네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음이 누그러지는데) ...그럼 하나만 더 먹을게. 나머지는 네가 다 먹어. 잘 먹고 많이 크기로 했잖아.
유스텐:하하, 디저트만 먹고 크는 사람이 어딨어요 -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들렌을 냠냠 먹는다)
릭사엘:(너를 따라 마들렌을 하나 집어 먹고는, 잘 먹는 네 모습을 마저 흐뭇하게 바라본다) ...단 걸 정말 좋아하네. 다음에 오면 또 준비해줄게.
유스텐:'난 이미 다 컸는데. 키도 커봐야 177cm까지밖에 안 자랄 거고.' (볼이 부풀 정도로 디저트를 한가득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릭사엘:(열심히 먹느라 부스러기가 묻은 네 입가를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닦아준다. 그리고는 제 행동에 멈칫하며)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
유스텐:웅. (웅얼거리며 천천히 꼭꼭 씹어삼키고는 마무리로 코코아를 마신다) 하... 아, 오랜만인데 너무 먹기만 했네요.
릭사엘:(네 입술 감촉이 남은 손끝을 거두어 어색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아무렴 어때. 잘 먹으면 좋은 거지. 난 네가 잘 먹는 모습 보면 좋더라.
유스텐:그래요? 흠. 다들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고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이라고 해도 릭스뿐이지만...'
릭사엘:('다들'이라는 말에 흠칫 손을 떨다가, 네가 알아채지 못하게 테이블 아래로 내린다) ...유스는 인기가 많은가보네.
유스텐:어... 많지는 않아요. 애초에 사람 마주치는 일을 안하려고 해서. 한 .... 한 두 사람 정도? '한 명만이라고 했다가 친구 없어보이면 어떡해.'
릭사엘:...그래? (살짝 안도하며 방긋 웃는다) 나랑 있을 때 더 잘 먹여야겠다.
유스텐:어째 하는 건 없고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은데... '이러려고 과거로 온 것도 아니고.' (양심에 찔려서 헛기침을 하며)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요?
릭사엘:음, 그런 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유스는 뭘 할 수 있는데?
유스텐:정리정돈? '아, 생각해보니 릭스... 정리정돈을 무지 못했지.' 요리나 빨래 같은 가사에 해당하는 건 다 할 줄 알아요.
... 요리는 취소할게요.
릭사엘:(가만히 듣고 있다가 취소한다는 말에 키득거리며) 요리는 자신이 없어?
유스텐:즉석 식품이나 에너지 바 같은 것만 먹은지 오래돼서 다 까먹었어요...
릭사엘:...즉석 식품? 에너지 바? 그게 뭐야?
유스텐:아 - '이런, 또 미래 얘길 해버렸네. 이정도는 괜찮으려나.' 즉석 식품은 말그대로 조리된 요리를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나온 거예요. 에너지 바는... 뭐랄까... 시간 없고 끼니를 간단하게 떼우기 좋게 나온? 시리얼과 견과류 등을 뭉쳐놓은 거랄까...
릭사엘:음... 그렇구나. 이해했어. 그것들은 맛있어?
유스텐:(시선을 피하며) 하하... 먹을만 해요...
릭사엘:(맛 없다는 뜻이구나) ...맛있는 거 줄게. 자주 와.
유스텐:마음은 그러고 싶어요. 또 9개월 뒤겠지만...
릭사엘:하하, 9개월 뒤 될 때쯤부터 주방장에게 음식 많이 차리라고 지시라도 해야겠네.
유스텐:조금만 줘도 황송한데 뭘 그렇게까지 해요. (웃으며 대답하다 네 젖살도 안 빠진 얼굴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현대의 릭스는 볼이 홀쭉하지...' ... 릭스, 나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릭사엘:응? 그래. 뭔데 그래?
유스텐:볼 만져봐도 돼요?
릭사엘:...? 갑자기? 내 볼을? 안 될 건 없지만...
유스텐:정말? 무르기 없기?
릭사엘:(왜 저렇게까지 비장한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여준다) 응. 무르기 없기.
유스텐:약속한 거예요? 그럼 -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손을 뻗어 일단 검지로 볼을 콕 눌러본다) 헉... '말랑하다... 그것도 엄청...!'
릭사엘:으응... (생소한 감촉에 살짝 볼을 붉힌다)
유스텐:당겨봐도 돼요?
릭사엘:당...기기까지...? 그래...
유스텐:(집게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잡아 어디까지 늘어나는지 확인한다.) '와...'
릭사엘:으아- 어아는 어야- (뭐하는 거야)
유스텐:너무.... 너무 귀여워요, 릭스.... (마치 자기 아이인 것마냥 깜찍해 죽겠다는 듯이 찡그려 웃으며 이젠 두 손으로 네 볼을 쭉쭉 당기다가 매만진다)
릭사엘:으우...- 이웅 이앙해... (기분 이상해)
유스텐:'아기 릭스는 이런 느낌이구나...' (사심 가득 담아 만지다가 너를 꼭 안고 뺨을 부빈다) 릭스 부모님은 진짜 좋으시겠어요.
릭사엘:(뺨이 당겨지다 말고 몸이 네 품에 가득 안기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유스텐:아들이 이렇게 귀엽고... 깜찍하고... 말랑하고... 똑똑하기까지 하잖아요.
나중에 배우자가 얼마나 행복해하겠어요? (진짜로 행복하다)
릭사엘:(갑작스런 칭찬 세례에 볼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유... 유스도 참... 그렇게 말하니까 부끄럽잖아.
유스텐:사실만 말했을 뿐인걸요? (아, 안되겠다. 고개를 뒤로하고 다시 말랑말랑한 볼을 꾹꾹 눌러본다)
릭사엘:으응... 내 볼보다 유스 볼이 더 말랑할 텐데- 본인 볼은 안 만지고...
유스텐:원래 자기 거 만지는 것보다 남의 거 만지는 게 기분이 좋거든요.
릭사엘:그런 거야? 으음... (문득 네 뺨을 주물렀을 때의 촉감이 떠오른다) 으응... 좋긴 좋은 것 같긴 했지.
유스텐:그렇죠? 하아 -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네 뺨에 볼을 부빈다) '이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니...'
릭사엘:(가만히 네 손길에 제 얼굴을 맡기고 있다가, 네 뺨까지 제 뺨 위로 닿자 몸이 딱딱하게 굳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눈동자를 바르르 떨며) 유, 유스으... 자꾸 이러면 나 부끄러워...
유스텐:(후다닥 거리를 벌리며) 헉, 미안해요. 내가 너무 욕심부렸죠...
'어린이 성추행범으로 잡혀갈 뻔 했다...'
릭사엘:아, 아니... 싫었다는 게 아니라... 좋, 좋긴 했는데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가만히 꼼질거린다)
유스텐:'지금의 릭스는 나랑 친구 사이니까 조금 부담스러웠으려나...' 그럼 여기까지만 할게요.
릭사엘:으음... 더... 안 해? (넌지시 물어보며 발갛게 달아오른 낯으로 너를 바라본다)
유스텐:응? 부끄럽다고 하길래...
릭사엘:싫은 게 아니라... 좋, 좋긴 하다니까... (이런 적이 처음이라 볼이 새빨갛게 물든다)
유스텐:(꿀꺽-) 그러면 더 해도 돼요?
릭사엘:...응. (설렘이 가득 묻은 눈으로 상체를 숙이고 너를 살짝 올려디본다)
유스텐:'어떡해......... 완전 강아지 같다. 어린 시절의 릭스는 완전 강아지구나.' (사양 않고 야무지게 반죽하듯이 네 볼을 쪼물딱거리다가 네 손을 잡아 제 뺨 위에 올려주며) 릭스도 만져볼래요?
릭사엘:(부끄러움과 설렘이 혼재된 채로 손끝을 바르르 떨며) ...응. (조심스럽게 네 말랑한 볼을 쓸다가 조물조물 주무른다) 말, 말랑해... (두근거려)
유스텐:'구도가 좀 이상한데, 이거.'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네 뺨을 주무르던 손을 떼고 헛기침을 한다.) 아직 이 몸은 어리니까요.
릭사엘:그렇, 지. (홀린 듯 계속 네 토실토실한 뺨을 주무르다가, 불현듯 엄지 손가락에 스치는 입술 감촉에 파르르 떤다)
유스텐:(가만히 있으려니 또 심심해서, 네가 만지는 도중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릭사엘:(무방비하게 네 뺨을 어루만지다가, 손 안에서 빵빵해지는 감촉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이내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손가락을 꾹 누른다)
유스텐:(네가 볼을 꾹 누르자 푸 - 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덩달아 키득거린다)
릭사엘:(키득거리는 소리를 뚫고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점차 잔잔하게 웃는다) ...우리 너무 유치하게 논다. 안 그래?
유스텐:유치해도 될 나이인데 뭐 어때요 -
릭사엘:언제는 어린 애도 꼬마도 아니라더니?
유스텐:릭스는 유치해도 될 나이인 게 맞고, 나는 그런 릭스와 함께 놀아주는 어-른! (으쓱)
릭사엘:(네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아직 꼬마 유스인걸. 어른 유스 되려면 멀었어.
유스텐:참나 - 자꾸 꼬마꼬마 거리는데, 어른인 내가 특별히 봐주는 거예요.
릭사엘:알았어, 애기야. 고마워. (저보다도 한참이나 작은 네 정수리를 토닥토닥해준다)
유스텐:누가 누굴 보고 애기라는 건지... 아, 곧 가정교사가 방문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릭사엘:음... 그렇긴 한데, 내가 수업 받으러 가면 넌 뭐하려고? 따라오게?
유스텐:수업 받으러 가면 이대로 또 강제로 9개월 뒤에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릭사엘:...아픈 척하고 가지 말까?
유스텐:그러면 백작님께 혼나실텐데 ~
릭사엘:(끄응) ...하지만 9개월은 긴 시간이란 말이야.
유스텐:따라갈까요?
근데 무슨 수업이에요?
릭사엘:...성, 교육.
유스텐:... (슬쩍) 그냥 9개월 뒤에 볼까요?
릭사엘:... 그건 또 싫은데.
유스텐:솔...직히 궁금하기는 했어요. 귀족들은 어떤 내용을 듣는 건지.
릭사엘:보통은... 성적 금기에 대해 많이 가르치고... 음... 어떤 행위를 하면 아이가 생기는지도 얘기를 해주시긴 해.
유스텐:...? 그정도면 다 알려준 거 아니에요?
릭사엘: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기본적인 건 알고 있는지라 더 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해. 그런데 아버지 지시니까 뭐... 받아야지 어쩌겠어.
유스텐:...괜찮아요? 내가 같이 듣는 거.
릭사엘:음... 유스는 미래에서 성인이라고 했으니까, 안 될 건 없지 않을까?
유스텐:그건 그런데, 릭스가 나랑 같이 듣는 게 괜찮은가 해서요.
릭사엘:어... 글, 쎄? 난 잘... 유스 편한대로 해.
유스텐:'어차피 미래에 내 남편인데 상관없나.' 그러면 듣고 싶어요.
릭사엘:그,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야 안 될 것 없지.
릭사엘은 당황스러움을 겨우 감추면서 큼큼거리고는
시간을 잠시 확인하더니 당신의 손을 감아쥡니다.
어린 아이의 손이지만, 당신보다는 여전히 큰 손이
따스한 온기로 당신을 잡아끕니다.
릭사엘을 따라 복도를 건너 계단을 내려가고
또 다시 복도 깊숙이 들어가면
인적이 잘 닿지 않는 외곽의 서재의 문이
살짝 열려 있습니다.
새하얀 레이스 커튼 뒤로 얼어붙은 창문이 바로 보이고
벽에 맞닿은 책장들에 고전 서적, 성경, 고지도, 라틴어 문법서 등이
빼곡히 꽂혀 있습니다.
공기는 고요하지만 묘하게 긴장되어 있네요.
젊은 나이의 남성, 아무래도 가정교사로 보이는 이가
둥그런 알의 단안경을 쓰고 냉정하게 책을 넘기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결벽증처럼 정돈되어 있군요.
가정교사:오셨군요, 도련님. 조금 늦으셨습니다.
릭사엘:...사유가 있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시간을 숙지하고 행동하지요.
가정교사:알겠습니다. 와서 앉으시지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배운 육체를 정결히 하는 법에 더불어 부부의 결합 방식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스텐:(초롱초롱) '와... 진짜 본격적이네... 제목부터 예사롭지가 않잖아. 그나저나 진짜로 내가 안 보이는 게 맞구나. 신기하다...'
릭사엘은 조심스럽게 당신을 돌아보며
의자가 나란히 두 개 놓인 책상에 당신과 함께 앉습니다.
가정교사는 천천히 서재의 문을 닫고는
진중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다가와
묵직한 책을 열어 당신들에 앞에 펼칩니다.
유스텐:
관찰력
기준치:55/27/11
굴림:60
판정결과:실패
(GM):
...
책이 펼쳐지자 마자 살색 향연이 펼쳐집니다.
삽화 속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묘사된 남녀의 몸이 겹쳐 있습니다.
보기 드물 정도로 적나라한 그림이로군요...
가정교사:도련님께서도 차후 성년이 되실 것이니, 이러한 행위를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배우셔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배우는 것들은 가문을 잇고 배우자를 보살피기 위해 알아야 할 기본 지식이지요.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유스텐:(엄청난 살색의 향연에 경악하며) 와...'너무 사실적인 거 아닌가? 이걸 13살짜리 애한테 보여준다고??? 현대였으면 이미 문제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가정교사는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입니다...
유스텐:(가정교사를 흘끗거리며) '이런 걸 알려줄 것 같이 생기지는 않았는데... 혹시 겉만 이렇고 속은 변태인 거 아냐?'
릭사엘:네, 알겠습니다. 수업 시작해주십시오.
분명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성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던 것 같은데
책이 앞에 펼쳐지자 마자 릭사엘은 학구열 모드에 돌입했는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 릭사엘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가정교사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설명을 시작하는군요.
가정교사:(도련님 앞에 펼쳐진 삽화의 하반신 일부분을 가리키며) 통상적인 부부 간 육체의 결합은 이 삽화와 같이 이루어집니다. 삽화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부부가 합방할 때에 가장 보편적이고도 합리적인 자세는, 여인이 등을 대고 눕고 남편이 위에서 맞이하는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이 자세는 여인의 몸을 무리 없이 보호하며, 씨앗이 자궁 깊숙이 전달되기에 후사를 얻는 데 가장 이롭지요. 흔히 배향 정위(婦背仰位)라고 불리우며, 삽입 각도가 곧고 깊어 자궁경부에 정액이 가까이 도달합니다. 그에 따라 임신 확률 또한 가장 높다고 기록되고 있으니 도련님께서도 차후 부부 관계를 가지실 때 이 자세를 주로 채택하시면 됩니다.
유스텐:'이딴 걸 13살짜리 애한테 알려준다고???' (삐그덕삐그덕 고개를 돌려 릭사엘의 표정을 확인한다)
유스텐:
심리학
기준치:60/30/12
굴림:25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릭사엘은 애써 태연한 척 책을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예상 외의 적나라한 설명에 쭈뼛쭈뼛 목을 바짝 세운 것이 티가 납니다.
하긴 고작 13살의 아이에게 이런 정보는 과하겠지요...
유스텐:'의외로 침착하네... "척"하는 거겠지만. 보면 볼수록 또래 애들 답지 않은 면이 있단 말이지. 같은 나잇대의 다른 아이였으면 키득거리기 바빴을텐데.'
릭사엘:...그렇군요. 유념하겠습니다. (눈 둘 곳 없어 황망하기 짝이 없지만, 차마 가정교사의 시선 아래서 다른 곳을 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꾹 버틴다)
릭사엘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가정교사는 곧장 다음 삽화를 펼칩니다.
가정교사:(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종이 위를 짚으며) 이 자세는 여성 승위(婦上位)라고 불리우는 자세입니다. 남성이 누워 있고, 여성이 남성 위에 올라타 삽입하지요. 이 자세는 남성이 체력이 약하거나 오래 서 있지 못할 때 유용하고, 여인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어 심리적으로 배우자에게 안정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잉태를 목적으로 한다면 삽입이 얕아 자궁에 닿는 정액의 흐름이 덜 유리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잉태를 원하면 삽입 후 잠시 정지해 정액이 안쪽으로 머무르게 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유스텐:'진짜 가지가지 알려주네... 이런 게 진짜 필요한가? 어차피 같은 자세로 한 번만 하지도 않을텐데.(?)' (알렉스가 보여준 포르노 잡지나 DVD 가 더 자극적이기도 하고, 서적에 나온 그림은 정말로 교육용으로밖에 안 보여서 턱을 괴고 시큰둥하게 바라본다)
릭사엘:(머리가 핑핑 도는 채로 간신히 가정교사의 말을 주워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릭사엘이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가정교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다른 삽화도 가리킵니다.
이번에는... 후배위로군요.
민망하기 짝이 없네요.
가정교사:(진중한 목소리로) 후방 삽입(後接位)입니다. 여성이 무릎과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거나, 상체를 침상에 숙이고, 남성은 뒤에서 삽입하는 자세이지요. 이 체위는 깊은 삽입이 가능하여 정액이 깊이 닿기 쉽습니다. 또한 여인의 배나 유방에 압박이 적어, 임신 초기의 불편함을 줄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각도와 속도 조절이 중요합니다. 너무 급격하면 자궁경부에 충격을 줄 수 있고, 상대가 불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야와 접촉이 적으니 말과 손길로 안위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가장 임신 확률이 높은 자세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습니다. 다만 신체적 조건, 시기의 생리 상태, 양측의 편안함을 고려하면 앞서 말한 ‘배향 정위’나 ‘후방 삽입’이 이론적으로 유리하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니, 단 하나의 방법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릭사엘:(동공을 파르르 떨며 간신히 대답한다) 네, 네...
유스텐:(힐끔) '역시 13살짜리 애한테는 너무 과한 정보야. 사춘기는 왔으려나, 우리 릭스...'
릭스, 괜찮아요?
릭사엘:(작은 목소리로) 으, 응... (음란한 성교육 설명을 들은 직후 네 얼굴을 보자 자못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유스텐:'이런 내용이... 이만한 두께가 나온다고??' (서적을 빤히 바라본다)
가정교사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릭사엘은 갈수록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무슨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이는지도 모르는 듯하네요.
유스텐:흠... (중얼) 역시 남녀에 대한 얘기만 나오네.
릭사엘:(충격적인 내용에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다가 네 들려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어, 어...?!
유스텐:'남녀 얘기만 한가득인데 릭스는 어떻게 그렇게 능숙했던 거지? 재능인가?'
가정교사:(갑자기 소리를 내는 도련님을 내려다보며) 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릭사엘:(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아, 아닙니다 미스터 라퍼트...
가정교사:(경황이 없어 보이는 도련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말입니다. 오늘 학습한 내용은 무척 중요하니, 수업은 복습 시간의 마련을 위해 일찍 파하도록 하지요. 참고 서적을 포함한 삽화집을 함께 드릴 테니 꼼꼼히 확인하시고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유스텐:'예습과 복습을 하라고...? 어떻게?'
릭사엘:(들리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새빨간 얼굴로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본다) 네, 네...!
유스텐:릭스, 예습이랑 복습 할 수 있어요...? 자리 피해줄까요?
릭사엘:(네 들려오는 말에 솜털 하나하나까지 쭈뼛 서서 입술을 꾹 다물고 파르르 떨고 입 모양으로 시늉낸다. 아 정말...! 무, 무슨 소리야...)
유스텐:흠. 상대도 없는데 예습이랑 복습을 어떻게 하라는 거지...? 설마 이 그림만 보고 공부하라는 뜻이에요?
릭사엘:(네가 '상대'라는 말을 꺼내자 마자 뒷말은 머리를 스치지도 않고 그대로 빠져나간다. 왜 하필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너인지... 민망해서 죽을 것 같다)
유스텐:신기하다...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교육받는구나. 그래도 릭스 나이에 배우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요.
괜찮으면 삽화집 구경해도 돼요?
릭사엘:(끄덕끄덕) ...
가정교사는 수업을 홀가분하게 마친 얼굴로 릭사엘의 앞에
몇 가지 삽화집을 내려두고 둥근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습니다.
가정교사: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련님. 이후 수업 시간에 학습 상황을 파악할 테니, 질의응답을 준비해두시지요.
릭사엘:(파르르 떨며) ... 네, 감사합니다...
가정교사는 문가로 걸어가며 코트를 정돈하고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위를 건너갑니다.
찰칵, 문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리고
그 뒤로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집니다.
릭사엘:(새빨간 토마토처럼 익은 얼굴로 네 앞에 삽화집을 건네주며) 구경... 해.
유스텐:(등받이에 편하게 기대 늘어지며 두 손으로 삽화집을 들어올린다) 릭스는 공부 안 해도 돼요?
아까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까... 시험 비스무리하게 질의응답을 할 거라고 한 것 같은데.
릭사엘:나, 나중에 천천히... 천천히 보면 돼... (입술을 꾹 깨물고 터져오를 것 같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다)
유스텐:그래요? (별 신경쓰지 않고 삽화집을 파라라락 대충대충 빠르게 넘겨본다) '온갖 체위란 체위는 다 넣어놨네.'
유스텐:
관찰력
기준치:55/27/11
굴림:26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책을 넘기다 보면 [제 VI장 ― 비정상적 결합에 대하여] 라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네요.
부부 간의 합일은 본디 자연이 허락한 기관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곧 자손의 번식과 가문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일부는 부적절한 호기심 혹은 일시적 쾌락을 좇아,
본래의 통로가 아닌 항문을 통한 삽입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는 본 장에서 말하듯 '비정상적 결합(union contre nature)'에 속한다.
라고 쓰인 말 너머로 항문 성교를 하는 삽화들이 실려 있습니다.
유스텐:헉! (하며 뒤로 넘어갈랑말랑 할 정도로 기댔던 자세를 바로 고쳐앉는다.) '미친...! 항문 성교가 이때도 알려져있었단 말야?'
릭사엘:(네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슬쩍 옆으로 다가와 삽화를 보고는 빳빳이 굳는다)
유스텐:(슬쩍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여 너와 거리를 벌려 삽화를 못 보게 한다) ㄹ,릭스가 보기엔 너무 이른 내용 같아요.
릭사엘:(이미 다 봤는데...) 그... 나라고 아예 항문 성교에 관해 몰랐던... 건 아니라... 그렇게 기겁할 것까진 없... 어...
유스텐:전혀 모르지 않았다고요...? 이거 엄청 뒤에 있는 내용인데...?
릭사엘:그... '소돔적 죄악'이라고 해서... 소돔법에 대해서 법학 시간에 들어봤어. 항문 성교는 자손을 얻을 수 없는 헛된 결합으로 가문의 의무를 방기하는 행위라고... 그래서 동성 간 성행위를 사형까지 처벌하는 중범죄로 간주한다고 하던데... 진위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럴 듯하다고, 생각은 해봤었지...?
유스텐:아하 - (삽화집을 탁 덮으며) 제가 오해했네요.
릭사엘:으, 응...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네 얼굴을 부끄러운 듯 힐끔거린다)
유스텐:(삽화집 표지 위로 엄지손가락을 톡-톡- 두드린다) ... 릭스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릭사엘:어... 음... 글쎄... 가문을 잇는 행위?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면 좋겠지만... 사교 시즌에 전면적으로 나설 수 없는 성직 가문의 위치인지라... 그런 건 어렵겠지...
유스텐:(턱을 괴며 반눈을 뜨고 삽화를 내려다본다) 그러면 릭스는 나중에 백작님께서 정해주시는 상대와 결혼할 확률이 높겠네요.
릭사엘:... (약간은 서글픈 표정으로) 그렇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유스텐:성직 가문이라는 건 굉장히 성가신 위치네요.
릭사엘:하하... 아무래도... (어차피 연애 결혼을 한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하지는 못하겠지)
유스텐:(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우리 첫 만남 때처럼 도망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릭사엘:... (사실은 네가 날 데리고 도망가 주면 좋겠어. 그렇지만 그런 건 어렵겠지) 하하... 농담도.
유스텐:(잔잔하게 눈을 감고 미소지으며) 아직은 다행스럽게도 백작님이 약혼할 사람을 지정하지 않았으니, 현재를 즐기도록 할까요.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릭사엘:응...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어서 네 어깨에 고개를 툭 떨군다)
유스텐:릭스...? (눈썹을 들어올리며 이름을 부르다 네 기분을 알 것 같아서 살며시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릭사엘:(입술을 달싹이다가) ...내 의지는 반영이 되지 않겠지만... 내가 만나게 될 사람이, 너 같은 사람이면 좋겠어 유스.
유스텐:...나 같은 사람이요?
릭사엘:...응.
너무 실현 불가능하고 막연한 소리일까?
유스텐:(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전혀.
릭사엘:(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자그마한 네 어깨에서 숨을 고르게 쉰다)
유스텐:불편하지는 않아요?
릭사엘:(살짝 웃으며) 조금? 유스 키가 작아서 고개 얹기가 쉽지는 않네.
유스텐:불편하면 편하게 소파나 침대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혹시 다른 일정이 남아있나요?
릭사엘:음, 아니. 이제 곧 저녁 시간이라 (숨을 살짝 들이켜 네 체향을 맡고는) ...일정은 따로 없어.
유스텐:그럼 남은 시간 동안 뭐하고 싶어요?
릭사엘:...너랑 같이 있기.
유스텐:응? (예상치 못한 답변에 눈을 깜빡이다 부스스 웃어버린다) 아하하! 지금 이미 같이 있잖아요.
릭사엘:그렇지. ...너랑 있는 거면, 너랑 하는 거면 뭐든 좋다는 뜻이었어.
유스텐:언제는 부끄러워했던 것 같은데.
릭사엘:그거야... 음...
(구구절절 설명하려다가) ...이거 꼭 얘기해야 해?
유스텐:'아직 어려서 그런가, 부끄럼이 많네. 뻔하다 뻔해 -' (한참이나 어린 아이를 보듯 히죽히죽 웃으며) 강요는 아니죠?
릭사엘:으응... (어리광부리듯 네 몸을 옆으로 안으며 살짝 피곤한 눈을 깜빡인다)
유스텐:(네 등을 쓸어내리며) 성교육 수업 때문에 많이 지친 것 같네요.
릭사엘:응... 저녁 식사 건너뛰고 씻고 자고 싶어. 그런데 그러면 네가 또 없겠지...? ...
유스텐:(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 씁쓸하게 웃는다)...
릭사엘:...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슬그머니 웃으며) ...나 이대로 잠깐 눈 좀 붙일게. 아주 잠깐이면 돼.
유스텐:(네 정수리에 입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인다) 잘 자요, 릭스.
릭사엘:응... 나의 꼬마 유스. (고른 숨을 내쉬며 천천히 수마에 빨려든다)
릭사엘이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밑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낯선 중력이
당신을 잡아당깁니다.
익숙한 감각입니다.
심장은 제멋대로 빠르게 고동칩니다.
본능적으로 몸이 시간을 건너 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아직, 아직 릭사엘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데...
어떻게든 릭사엘을 깨워 이 감각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당신의 손이 뻗어지는 것보다 정신이 훅 꺼지는 것이 빠릅니다.
.
.
.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익숙한 감각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몰려드는 시야를 받아들입니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습기가 어린 서늘한 공기.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려오는 요란한 빗소리와
쇠냄새입니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비릿하기 짝이 없는.
지난 기억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피냄새입니다.
묵직한 금속성의 냄새가 목을 콱 조입니다.
이윽고 드러난 시야 속에서 눈을 깜빡이면
저택의 메인 홀은 마치 무너진 제단처럼 변해 있습니다.
벽난로 위에 흩뿌려진 피,
대리석 바닥에 뒤섞인 발자국과 조각난 인간의 파편들.
아름답던 샹들리에는 한 쪽으로 기울어져 금실이 끊겨 있고
그 밑에 쓰러진 하녀의 손끝이 얇게 떨리고 있습니다.
유스텐:이게 대체... (흔들리는 눈으로 이곳저곳을 훑는다)
눈앞의 장면이 너무 현실적이라,
시간의 감각조차 잃어버릴 정도입니다.
당신이 참사의 현장을 둘러보면
계단 밑,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유일하게 그 사이를 서 있습니다.
"이런, 이런 일은..."
부서지는 목소리.
피가 범벅된 시체를 끌어안은 누군가.
검붉게 얼룩진 차림새가 된 사람.
당신은 숨을 삼키며 그 사이를 믿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갑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무너진 샹들리에의 유리 조각들이 미세하게 날립니다.
가까이서 다가가 확인한 이의 어깨는
절망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듯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툭, 당신의 발치에 한 장의 낡은 기도서가 떨어져 있습니다.
릭사엘:(절망에 빠져 우느라 차리지 못했던 정신으로, 뒤늦게 다가온 인기척을 마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
유스텐:(말없이 네게 다가가 너를 한껏 끌어안아 제게 기대도록 한다.)
바람을 맞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릭사엘의 몸이
당신의 몸으로 풀썩 쓰러집니다.
그에게 옮겨붙은 자욱한 피 냄새가 당신에게도 옮겨붙습니다.
릭사엘:(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앓는 소리만 내며 울어낸다)
유스텐:(슬픈 눈을 하고 네가 울음을 다 쏟아낼 때까지 등을 쓸어내려준다)
빗방울이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스쳐 지나가며
붉게 젖어버린 바닥을 은빛으로 덮습니다.
들썩이는 어깨가 불현듯 너무나 작아서
숨도 쉬지 못할 만큼의 고요가 맴돕니다.
릭사엘:(입술을 벌린 채 많은 말을 삼키듯 흐느끼다가 겨우겨우 잠재운 목소리로, 턱턱 끊어지듯 말한다) 유, 스... 신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 으셔.
유스텐:(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감히 어떤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미래를 알고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밀려온다.) '...알려줘도 불안감만 심어줬을 거잖아. 그렇지만... 어린 릭스가 이 상황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릭사엘은 당신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듭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불빛에 비쳐,
피와 눈물이 섞여 번들거립니다.
릭사엘:(현실을 받아들이다 과부하가 걸려버린 듯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하하... 신이... 우리를 버렸어. 버렸어.
유스텐:(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가슴이 찢기는 것 같다. 밑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럽게 네 뺨을 천천히 닦아주다 다시 너를 꼭 끌어안는다)
절망의 구렁텅이까지 처박힌 사람에게서나 나올 법한 목소리.
이미 모든 것을 본 듯한 사람의 음성입니다.
어디선가 툭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다음엔 연기,
그리고 뒤이어 천장에서 떨어지는 불씨가 보입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앉은 불길이 홀 중앙으로 쾅 소리와 함께 떨어집니다.
피비린내, 연기, 불타는 천의 냄새가 뒤섞여
그제야 코끝을 시꺼멓게 태웁니다.
릭사엘:(가만히 홀로 떨어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나가, 유스.
유스텐:(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고개를 가로젓는다)
릭사엘:...나가라고.
유스텐:내가 나가면 뭐하려고 그래요...
릭사엘:뭘, 하겠어. 하하... 내가 뭘 할 수나 있어야지. (네 품에서 떨어져 네 가슴팍을 뒤로 밀친다)
유스텐:(밀쳐진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 그 말을 들으니까 못 가겠어요.
릭사엘:(울컥 차오르는 눈물에 설움을 토해내듯) 넌 여기 사람도 아니잖아...! 가! 가라고...! (분노하듯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너를 바깥까지 밀쳐낼 기세로 다가온다)
유스텐:
근력
기준치:50/25/10
굴림:25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릭사엘:
근력
기준치:60/30/12
굴림:25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릭사엘은 밀어내려고 해도 밀려나지 않는 당신의 가슴팍을
콱콱 쳐대다가 이윽고 힘이 풀린 듯 당신의 앞에 풀썩 무릎 꿇습니다.
그러다가 멍하니 주변에 번지며 타오르는 불길을 보더니
다시금 어린 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 시작합니다.
핏대까지 솟아난 목에 눈물이 흘러 넘칩니다.
릭사엘:(억울함을 덮어씌우듯 네 허벅지의 바짓자락을 비틀듯 움켜쥐며) 왜 안 가는데...! 흑, 흡... 가란 말이야, 제발...
유스텐:(무릎을 굽혀 앉아 바짓자락을 쥔 손을 따뜻하게 감싸쥔다) ... 계속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릭스.
난 당신이 위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릭사엘:...
왜, 왜... 왜... 어째서... 어차피 너한테 난 과거에 죽은 사람이잖아. (후두둑 눈물을 떨군다. 손아귀에 잔뜩 실려 있던 힘이 네 체온에 훅 풀린다)
유스텐:(쓴 웃음을 지으며 속눈썹을 내리깔고 말을 삼킨다) ... 그러게요.
이기적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살았으면 해요.
릭사엘:하하... 살면 뭐가... 달라지니? ...
유스텐:... 그럼 죽으면 뭐가 달라지나요?
릭사엘:...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우리 가문을 급습할 정도의 대단한 인원이 그저 폭동 같은 잔챙이였을 리도 없어. 우리 가문은... 버려졌어. 버려진 거라고. 세상에서.
네가 그 무게를 알아?
유스텐:... 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당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건 당신답지 않아요.
어딘가 도움을 청할 곳이 없나요?
릭사엘:도움을 청한다고... 달라질 순 없어.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어.
유스텐:그럼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릭사엘:...그러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유스텐:(흘끗) '마침 비도 오고, 릭스가 검은색 옷을 입어서 밖으로 나가도 크게 이목을 끌진 않겠지.' (네 두 손을 꼭 잡으며) 일단 밖으로 나가요.
릭사엘:(피와 눈물로 가득 젖은 채 씁쓸하게 웃으며) ...내가 두고 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겠지?
유스텐:(엉망이 된 네 얼굴을 옅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슥슥 닦아준다) 이제는 잘 아네요.
릭사엘:넌 정말 고집불통이야, 유스...
유스텐:(피식) 누구한테서 많이 배웠나 보죠.
릭사엘:...나는 아닐 테고, 누구길래. 잘못 가르쳤네... (힘이 완전히 풀린 듯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지려 한다)
유스텐:(네가 어깨에 기대도록 한 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부축한다)
유스텐:
근력
기준치:50/25/10
굴림:64
판정결과:실패
축 늘어진 몸이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주변을 활활 불태우는 불길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당신들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하고
매캐한 연기로 인해 정신이 조금씩 흐려져 옵니다.
그때, 두터운 구둣발이 탁탁탁 소리를 내며 달려와
무너져내리는 잔해 속에서 릭사엘을 가만히 어깨에 들쳐멥니다.
누굴까요.
혼자 놓인 당신이 의문의 사람을 올려다보면
전신을 가린 후드 너머로 새빨갛게 물든 남색 머리카락이 보입니다.
아, 정신이 흐려집니다.
이대로 릭사엘을 혼자 둘 순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