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른이 되어버린

 

 




25

어른이 되어버린


햇살이 정오의 기울기를 따라
천천히 건물 틈새로 스며듭니다.
하늘은 옅은 금빛으로 번지고,
붉은 벽돌 위에 따뜻한 빛이 반사되어 반짝입니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공기엔 습기가 묻어 있고,
먼 발치에서 시간을 알리듯 종탑이 울립니다.
다녀본 적은 없지만 얼핏 봐도 이곳이 대학교의 풍경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롭게 오가는 학생들,
강의동으로 보이는 직각으로 된 건물들
사람들의 품에 들린 두꺼운 전공서적과
정장을 입은 나잇대 있어보이는 노신사들이 보입니다.
유스텐:(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긴... 대학교인가? 또 9개월을 넘긴 것 같은데...
'릭스는 어딨지? 항상 금방 만났으니까 근처에 있으려나?'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놓인 벤치에 책을 읽고 있는
키가 큰 남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검푸른 머리카락 위로 잘게 부서지는 햇살의 조각들이 익숙합니다.
벤치의 등받이 위와 연못의 물결이 반짝이고
교정에 심어져 있는 활엽수들이 바람결을 따라
시들어가는 잎사귀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릭사엘이 그 사이에서 홀로 벤치에 앉아
두꺼운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잠시 그를 아는 듯한 학생 몇 명이 다가와
몇 가지 말을 건네고는 지나갑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짧게나마 그들을 마주보며 스쳐지나간 미소가
여전히 다정하기 짝이 없어서
릭사엘이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네요.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교정에 홀로 벤치에 앉아 있다는 점이
그가 누구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허락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유스텐:(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어떤 내용을 읽고 있는지 본다)
릭사엘:(집중해 책을 앉고 있다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살며시 머리카락을 넘기며 옆을 돌아본다.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피워내며) ...또 3년이나 걸렸어, 유스? 늦잠꾸러기구나.
앉아서 릭사엘을 올려다보려고 하면
고개가 꺾여지는 각도가 현대에서의 각도와 같습니다.
완전히 성년이 되었음을 증명하듯
어릴 적의 미숙한 티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뻗어져오는 손은 당신이 원래 알던 손처럼
크고 단단합니다.
툭, 그가 들고 있던 책이 떨어져 풀밭을 구르기 무섭게
당신의 머리카락 위에도 손이 내려앉습니다.
상냥하고 따뜻한 손입니다.
유스텐:(대신 몸을 숙여 책을 줏어 네게 건넨다) 이젠 정말... 어른이 다 됐네요, 릭스.
릭사엘:그런 셈이지. (네가 건네주는 책을 받아 옆 벤치 위에 내려두고는 네 머리카락을 보드랍게 옆으로 넘겨준다) ...보고 싶었어, 나의 꼬마 유스.
유스텐:내 외관도 스무 살이 되었을 텐데 여전히 꼬마 유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릭사엘:응, 여전히 작잖아. 알맹이도 똑같고.
유스텐:(삐쭉) 알맹이도 똑같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릭사엘:(작게 키득거리며) 아직도 내면은 24살 아니야? 그럼 똑같지. 똑같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여리고,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여전히 내가 아는 유스일 것 아니야.
유스텐:'놀리는 줄 알았는데...' "사랑스럽고" 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들어가다니, 영광인데요?
릭사엘:아, 그랬어? 말하다보니 잊었나 봐. (작게 미소지으며) 뭘 영광까지야.
유스텐:(조용히 네 어깨에 고개를 떨구며 뻔한 말을 던진다) 잘... 지냈어요?
릭사엘:네가 보고 싶어서 잘 못 지낸 것 같아. 이번에는 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거야. 나 안 보고 싶어? 아닐 텐데-
유스텐:하하, 못 본 사이에 꽤 능글맞아졌네요.
릭사엘:(키득거리며) 아무래도 사람을 많이 만나다보니까 장난도 농담도 늘더라고.
유스텐:아까 보니까 3년 전에 봤을 때보다도 유명인사가 된 것 같던데.
릭사엘:그런 건 아니고, 키도 얼굴도 눈에 띄어서 다들 멀리서도 알아보는 정도야.
유스텐:아 - 나만의 릭스가 인기쟁이가 됐네요. 이거 좀 질투나는데 -
릭사엘:너는 여전히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일 테니까, 나로서는 다행이지. 나만의 유스.
유스텐:(옅게 웃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그럼 나만 억울한 건가...
릭사엘:그런 셈이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네 이마와 뺨을 둥글게 쓸어넘긴다) ... 컸다고 해도 어릴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네, 넌.
어른이 된 유스의 얼굴은 이렇구나. (장난스럽게) 생각보다 조금 실망스러운 걸?
유스텐:그런가요? 내가 보기에 당신도 비슷한데. 점잖아져서 그렇지.
(미간을 찌푸리고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실망이라고요?
릭사엘:응, 훨씬 더 어른스러운 모습이 될 줄 알았어. 어른이 되면.
유스텐:이왕이면 동안이라고 해줄래요?
릭사엘:(키득거리며) 동안이지. 귀여워. (검지 끝으로 네 코끝을 톡 두드린다)
유스텐:(피식) 장난도 - .
릭사엘:나만의 수호천사님이니까, 이런 장난도 받아주실 거죠?
유스텐:에휴 - 아량이 넓은 제가 받아줘야죠.
릭사엘:(천천히 웃으며 뒷머리를 쓰다듬고는, 엄지로 네 귓바퀴 안쪽을 매만지며) 이것 참 감사한 일이네요, 수호천사님.
유스텐:(눈을 감은 채 뺨과 함께 귀끝이 달아올라 경련한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학교 생활은 어때요?
릭사엘:그럭저럭 지낼만 해. 열성적인 교수님과 학구열 넘치고 친절한 학생들이 많고. 전공 과목도 흥미롭고, 아직까진 어려운 점을 모르겠어.
아, 지금은 공작님께서 마련해주신 타운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어. 기숙사에서 지낼 때보다 고요해서 마음에 들어.
유스텐:정말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요. 요즘은 어떤 걸 배워요?
릭사엘:고고학. 사실 민속학이나 인류학 계열로 가고 싶었는데, 그쪽은 신생 학문이라 학부가 없더라고. 그래서 이쪽으로 왔어.
그래도 이쪽도 재미있는 게 많아서 할만 해. 나중에 학문 연구를 할 거면 전공 영역은 좀 바뀌겠지만.
유스텐:그렇구나. '고고학은 의외인걸. 인류학을 공부했다는 건 들었어도.' ...부럽네요.
릭사엘:...그러고보니 유스는 대학 진학을 안 하고 바로 일을 구했다고 했지. 미련이 좀 있는 편이야?
유스텐:조금은. ...그래도 뒤를 돌아볼 생각은 없어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릭사엘:조금은 아쉽네... 유스가 대학 생활을 하는 모습도 조금은 궁금한데.
유스텐:어쩔 수 없죠. (미소지으며) 나 대신 열심히 다녀줘요. 그러면 대리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릭사엘:(마주 웃으며) ...이런, 책임이 막중해졌네. 큰일났는걸?
유스텐:큰일은 - . 이런 말 안 해도 열심히 다닐 거 다 알아요.
릭사엘:(키득거리며)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아는데, 유스? 내 어린 시절도 알고, 이젠 내 비밀도 거의 다 알고.
유스텐:너무 많은 걸 알아서 별로인가요? (벤치에 등을 기대며 농담을 던진다) 너무 많이 알면 보통... 불편해하거나 죽이겠다고 하던데.
릭사엘:별로라는 뜻은 전혀 아니고... (네 부드러운 뺨을 쥐다가 입술 위를 쓸어보며) 나에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생겼다는 게, 조금 새삼스럽긴 해.
유스텐:(피식 웃으며) 이제 와서? 새삼?
릭사엘:응, 새삼. (네 흔적을 더듬으려는 듯 길게 문지르다가, 천천히 손을 뗀다)
유스텐:(검지로 네 입술을 톡 건드리며) 나한테도 당신은 대체불가능한 존재니까 쌤쌤으로 칠까요.
릭사엘:(입술에 닿는 촉감에 살며시 볼을 붉히며) ...그건, 좋은 일일까? (미래에서의 네 삶이 존재할 텐데, 내가 이런 말에 기뻐해서는 안 되는 것일 텐데...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손끝에 혀를 톡 대어보곤,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몸을 살짝 뒤로 뺀다)
유스텐:(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물린다. 검지를 제 입술에 갖다대고) 좋은 일이죠. 서로에게 유일무이하다는 거니까.
릭사엘:좋은 일이기는 하지... (제 혀가 닿았던 손가락이 네 입술 위로 옮겨지는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황망하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 그걸 왜 입술에 대-...
유스텐:(외관은 현대의 릭스와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여전히 어린 티가 나서 더욱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까운 사이니까 이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릭사엘:그, 그,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끼리에서나 해야 한댔어... (태연하기만 한 네 얼굴을 보니 더욱 부끄러움이 오르는 기분이라 고개를 푹 숙인다)
유스텐:그래요? 입술끼리 닿는 것도 아닌데?
릭사엘:(끄덕끄덕) ...
유스텐:릭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릭사엘:... 갑자기...? 음... 없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햇빛에 감싸인 너를 마주본다)
유스텐:나부터 얘기해볼까요. 난... 그저 하루종일 안고 있고 싶어요.
릭사엘:...꼭 사랑을 해본 사람처럼 얘기하네, 유스는.
유스텐:그래요? (너를 마주보며) 그럴지도...
릭사엘:(살짝 어색해진 분위기에 입을 떼며) ... 나는, 음... 사랑하는 사람과 입을 처음 맞출 때의 감각이 어떨지 궁금하긴 해.
유스텐:(입술을 움찔거리다) ...릭스도 사랑을 해본 사람처럼 말하네요.
릭사엘:(흠칫 놀라 등줄기를 가늘게 떨며) ... 으음, 그렇게 들릴 줄은...
유스텐:아니에요? '혹시 3년 사이에 다른 누군가와 접점이 있었던 거면...'
릭사엘:...아니, 지. 말했잖아, 나는 너한테 관심을 다 쏟아서 다른 사람에게 줄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한 후에 제 말이 사랑 고백처럼 들릴까 싶어 노심초사한다)
유스텐:(아니라는 말에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네 어깨에 기댄다) 그럼 다행이고요.
릭사엘:(어깨에 기대어 오는 너를 떨리는 손으로 끌어안으며) ...유스. 난 너에게 모든 관심을 쏟지만, 너는 나에게 그러지 마.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으니까. 너는 네 삶을 살아야 하잖아.
유스텐:'뭐야? 나 또 고백도 안 하고 차인 거야?' (곧바로 뚱-한 표정으로) ... 싫어요.
릭사엘:...싫기는 왜 싫어. (살짝 웃지만 싫다는 네 말에 하염없이 마음이 안정된다)
유스텐:...당신이 좋아서요.
(툴툴) 내가 과거를 여행할 수 있는 시간도 한정되어있다는 말에 울었으면서...
릭사엘:... (심장이 크게 쿵쾅거리며) 그런...
...
유스텐:매번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왜 나에겐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릭사엘:... 그건... 말하는 걸... 참기가 힘들어서. (붉어진 뺨을 제 손바닥으로 슬쩍 가리며) ...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욕심부리게 돼.
유스텐:장난은 마음껏 받아달라고 하면서, 욕심은 안 부리는 거예요?
릭사엘:... 네 인생에서 나는 그저 스쳐지나갈 과거의 사람이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유스텐:(계속해서 밀어내는 말들에 상처받아 눈가가 축축해진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휙 돌린 채 중얼거린다.) 내가 왜 과거로 오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릭사엘:(시선을 슬며시 피하고 있다가 네 울 것 같은 목소리에 너를 바라보며, 손끝으로 습기가 배어나기 시작한 눈가를 문질러준다) ...울지 마, 유스. 응? ...네가 울면 내가 너무 아파.
유스텐:(이번만큼은 단단히 마음 상해서 네 손을 밀어낸다) ... 됐어요. 스쳐지나갈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다정하게 대하지 마요.
릭사엘:... (저를 밀어내는 네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고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상처 받은 것이 분명한 네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지며 가슴이 쪼개어지듯 멍든다) 유... 유스...
유스텐:(말없이 훌쩍이다가 벤치에서 일어나며) ... 잘 지내는 걸 봤으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요.
릭사엘:(황망하게 너를 따라 일어나 뒤에서 너를 푹 끌어안는다) 가지, 가지 마... (목소리 끝이 울음기를 머금어 떨린다)
잘못, 잘못했어... 제발...
유스텐:(뒤에서 겹쳐지는 온기가 너무도 따뜻해서일까. 아니면 귓가에 울리는 떨리는 목소리 때문인 걸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뺨을 가르며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바보 유스텐. 지금의 릭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는 거 아니잖아.' ...
릭사엘:가지 마... 네가 이렇게 가 버리면...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 (꾹꾹 눌러오던 설움이 북받친 듯 네 어깨를 끌어당기고 고개를 파묻어 눈물을 툭툭 떨군다)
유스텐:... (네 손등 위로 제 손을 살포시 올리며) 미안해요, 릭스.
(몸을 네게로 완전히 돌려 고개를 숙인 채 너를 꼭 안는다) 사실 갈 생각도 없었어요. 가고 싶지도 않고...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릭사엘:(슬픔으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로 네 옷자락을 꾹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가지 마, 사실 네가 떠나지 않으면 좋겠어. 흡... 내 옆에 계속 있으면 좋겠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했어, 난 단지, 끅, 단지 그 편이 너한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널 밀어내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유스텐:(어서 네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데. 울지 말라고, 시간이 지나면 평생 네 곁에 있을 거라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네 울음소리에 덩달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미래를 알려줘서는 안되겠지. 이 때의 릭스는... 현대의 릭스에겐 없는 기억들이니까. 알려줬다가 미래를 바꿔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미안해요...
릭사엘:(옆에 있어주겠다고는 절대 약속하지 못하는 네게 화가 나면서도 슬퍼서, 달아오른 눈시울로 뚝뚝 눈물을 흘리며 너를 붙잡고 계속 훌쩍거린다)
유스텐:... ... 릭스. 예전에 했던 살롱 놀이... 하다 말았었죠? 내 차례였던 것 같은데.
릭사엘:(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들려오는 말에도 잠자코 운다)
유스텐:... 내가 계속 과거로 찾아오는 이유는 릭스, 당신 하나 때문이에요.
릭사엘:(계속 훌쩍거리다가 네 말에 잠시 울음을 삼켜내며) ...나?
유스텐:응... 당신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는 모습까지 전부 알고 싶어서.
릭사엘:그게 왜... 알고 싶었...는데?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조금씩 눈물이 들어간다)
유스텐:(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말을 고르다가)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었으니까.
릭사엘:그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넌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거면서...
유스텐:...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면 절대 안되겠지.' 그냥,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할까요.
릭사엘:...내가 너에게, 우리 첫 만남이 그 정도의 의미였어?
난 어려서 무례하게 굴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유스텐:'나에게 있어 우리의 첫만남은 그때가 아니지만.' 큰 의미였죠. 내게는 구원처럼 느껴졌어요.
릭사엘:(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말에 무어라 답할 줄 모르고) ...고, 고마...워...?
유스텐:... (푹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어올린다. 굳이 더 설명하지 않고 웃으며) 자리를 옮길까요. 나야 다른사람 눈에 안 보인다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 눈으로 볼 때 혼자서 엉엉 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릭사엘:응... (그제서야 눈물 젖은 눈을 깜빡이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릭사엘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선을 그제야 자각한 듯
소맷깃으로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내고는
주저하듯 당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걸음을 옮깁니다.
천천히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대학 정문 앞에 검은 브루엄 마차가 조용히 멈춰 있습니다.
릭사엘을 알아본 마부가 손에 장갑을 낀 채 내려
당신들의 앞에 문을 열어젖힙니다.
릭사엘은 마부가 눈치채지 못하게 당신을 먼저 마차에 태워올리고
자신도 뒤따라 탑승합니다.
당신과 릭사엘이 마차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순간
살짝 젖은 듯한 말발굽 소리가 울립니다.
마차 안은 향초 냄새와 묵은 가죽향이 나고
쿠션 위에는 펜과 작은 노트가 놓여 있네요.
지나가면서 보이는 대학 정문을 보니
옥스포드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릭사엘은 정말로, 그가 바라던 대로
인류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왔었던 거군요.
곧 창문을 스치며 지나가는 거리에는
비의 냄새가 살포시 묻어 있습니다.
더러 마부가 채찍을 살짝 들어 말의 방향을 바꾸면
바퀴는 자갈 위를 매끄럽게 구르고,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만이 실내를 울립니다.
유스텐:바로 집에 가는 거예요?
릭사엘:응... 이 상태로 강의 들으러 가는 건 무리니까.
유스텐:어? 그, 그렇게 막 결석해도 되는 거예요?
릭사엘:교수님들에게 모범적이고 성실한 학생으로 인상 관리를 해둬서 괜찮아. 나중에 뵐 때 몸에 열이 나서 집에 갔었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실 거야.
유스텐:...? '철저할 것 같은 릭스가 무단 결석을 한다고???'
릭사엘:(놀란 것 같은 네 얼굴을 마주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네 코끝을 톡 두드린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유스텐:너무 의외라서요. 절대 안 빠질 것 같았거든요.
릭사엘:오늘 처음 빠지는 거야.
유스텐:...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
릭사엘:그러게, 이왕이면 주말에 와주지 그랬어. (키득키득 웃다가 몸을 숙여 네 무릎 위에 툭 고개를 얹는다) ...따뜻하다.
유스텐:미안해요. (네 옆머리를 쓸어내려주며) 불편하지 않아요?
릭사엘:응, 괜찮아. 유스 허벅지 포근해. 말랑하고.
유스텐:으음 - 그렇게 들으니까 부끄러운데.
릭사엘:난 좋기만 한걸? (어리광부리듯 네 허벅지에 뺨을 살짝 비비며 배시시 웃는다)
유스텐:(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을 살짝 들어올린다) 리, 릭스...
릭사엘:응? (고개를 살짝 틀어 네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미소짓는다)
유스텐:(어쩔 줄 몰라 손바닥으로 네 눈을 덮어버린다) 자, 자리도 넓은데 왜 여기 눕는 거예요...
릭사엘:(시야가 가려졌어도 네 표정은 눈에 박힐 듯 선명해서) ...네가 좋아서.
유스텐:(헛숨을 들이키다가) ... 아까는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니 뭐니 했으면서.
릭사엘:그건... 음... 내가 닿을 수도 없는 사람이면서 네 미래를 넘보는 건... 무례하고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입술을 살짝 달싹이며) ...상처주려고 한 말은 전혀 아니었어.
의도치 않게 상처 줘서 미안...
유스텐:... 그 말, 되게 오해하기 좋게 들려요. '전에는 우정이니 친구니 했으면서.'
릭사엘:...어떻게 오해하기 좋은데? (슬쩍 물어본다)
유스텐:전에는... 우리가 친구라고 했잖아요.
릭사엘:...응, 그랬지.
유스텐:...지금은 다른 의미로 들려서.
릭사엘:그 말도, 틀리진 않을 거야.
유스텐:(네 눈을 덮었던 손을 물리며) 틀리진 않을 거라는 건...
릭사엘:... 그건, 내가 꺼내어서는 안 되는 말이야.
유스텐:...
'릭스가 나를... 좋아하는 건가?'
릭사엘:(혼란스러운 듯한 네 얼굴을 올려다보며 손을 뻗어 코끝을 톡 두드린다) ...생각이 많아져?
유스텐:조금은요...
릭사엘:대체로 어떤 생각인데?
유스텐:... 기쁘면서도 미안하고, 슬프기도 하고 복잡해요.
릭사엘:뭘 그런 생각까지 해. 유스 넌 가끔 생각이 참 많더라.
유스텐:(어색하게 웃으며) 반박할 수 없네요.
릭사엘:(손을 살짝 내려 네 입술을 좌우로 쓸며) ...기쁜 건, 왜 그런 건지 물어봐도 돼?
유스텐:그건...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예요?
릭사엘:... 글쎄, 내가 과연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유스텐:(입술을 쓸어주는 네 손을 잡아 뺨에 갖다댄다) 난 당신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릭사엘:...내가 이걸 알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네 얼굴 궤적을 따라 가만히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유스텐: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릭사엘:글쎄... 몰라야 하는데. 이런 건... 옳지 않은데.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왜 난... 기쁜 걸까?
유스텐:(네 머리를 쓸어내리며 웃는다) 이번엔 당신이 생각이 많아졌네요.
릭사엘:난 항상 너만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졌었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야.
유스텐:하하, 나한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릭사엘:… 이런 지 10년이나 됐는걸, 난. 이상할 게 없지.
유스텐:(웃다가 놀란 표정으로) ... 10년이나요?
릭사엘:우리 만난 지가 10년이잖아. 몰랐어?
유스텐:그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릭사엘:(네 입술 중앙을 꾹 누르며) …무슨 말이 듣고 싶길래 그래.
유스텐:(흔들리는 눈을 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내가 릭스의 첫사랑이라고?' ...
말발굽이 점점 속도를 늦춥니다.
창밖으로 보이던 옥스퍼드의 거리가 서서히 멈춰서고,
마차 안의 흔들림도 조용히 가라앉네요.
돌바닥 위를 스치는 바퀴 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바퀴 굴러갑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릭사엘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킵니다.
허벅지 위가 허전해지는 감각과 함께
마차 문이 열리며 찬 공기가 스며듭니다.
릭사엘은 먼저 마차 밖으로 발을 딛고
이윽고 당신을 에스코트하듯 높은 마차에서 내려줍니다.
젖은 바닥 위로 구두굽이 맞닿는 순간
마차 안의 어둠이 햇살과 맞닿으며 녹아내립니다.
유스텐:(맞잡은 손을 슬쩍 내리며) '아까 한 대화 때문에 어색하다...' (이곳을 살펴본다)
조용한 정원이 딸린 타운하우스입니다.
회색 석재와 흰 회반죽으로 지은 3층 건물이네요.
창문마다 미세한 커튼이 걸려 있고,
창틀엔 초록빛 담쟁이가 반쯤 올라와 있네요.
정면에는 검은 철제 난간이 달린 작은 발코니가 두 개 있고,
1층 창 아래에는 심어둔 허브와 라벤더가 흔들립니다.
햇빛이 석조 벽면의 균열에 걸려 금색 실선처럼 번지네요.
아담하면서도 작지는 않은 크기의 저택입니다.
릭사엘은 마부에게 내일 아침에도 같은 시각에 나와달라 얘기하고는
당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끌어 안으로 이끕니다.
현관 계단을 어색하게 올라가려 하면
대리석 난간은 매끄럽고, 계단 끝에는 새처럼 조각된 석등이 양쪽에 놓여 있습니다.
문은 짙은 흑단색으로, 황동 손잡이에 햇살이 닿아 반짝입니다.
릭사엘이 현관문을 열어 당신을 안쪽으로 들여보내면
밀랍과 차, 옅은 라벤더 향기가 당신을 반깁니다.
집 안은 조용합니다.
벽에는 금빛 몰딩이 둘러져 있고,
창문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복도 바닥의 양탄자에 길게 드리워져 있네요.
빛이 천천히 움직이며, 공기 속 먼지가 그 사이에서 금가루처럼 떠 있습니다.
집안을 꼼꼼이 정돈하던 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합니다.
릭사엘은 하인에게 다과를 내오라고 이르며
달콤한 밀크티와 얼그레이 한 잔을 부탁합니다.
릭사엘을 마저 따라 복도를 건너면
커튼이 반쯤 젖혀진 거실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창밖으로 허브와 라벤더 잎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창가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 있네요.
표지가 반쯤 닳은 책 위로 황금빛 햇살이 미끄러집니다.
릭사엘:(네 앞에 테이블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아. 곧 하인이 애프터눈 티를 준비해줄 거야.
유스텐:애프터눈 티를요?! 릭스는 단 거 별로 안 먹잖아요...
릭사엘:네가 잘 먹잖아. (너를 의자에 앉히고 옆 의자에 앉아 가만히 정원을 내다본다)
유스텐:한 종류만 주셔도 좋은데... (살며시 두꺼운 책을 눈으로 훑는다)
『Archaeologia Britannia』 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라틴어로 쓰여진 제목이지만, 뜻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네요.
릭사엘:(가만히 너를 돌아보며) 우리 하던 말이 뭐였더라?
유스텐:(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어, 어? 음... 그, 글쎄요....
릭사엘:(테이블에 한쪽 팔을 올리고 가볍게 턱을 괴며) 왜 그렇게 당황해, 꼬마 유스.
유스텐:꼬마 아니라니까요....
릭사엘:꼬마지.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는데.
키도 나보다 머리 하나 만큼이나 작고.
유스텐:당신도 똑같이 생겼어요. 그리고 릭스가 너무너무 큰 거예요, 그건. 내 키는 평균에 가깝다고요.
릭사엘:그것도 맞지만, 어쨌든 작잖아. (귀엽기만 한 네 정수리 위로 손을 올려 약하게 아래로 꾹꾹 밀어본다)
유스텐:(인상을 쓰고 올려다본다) 으으 - 누르지 마요 - 키 작아지면 책임질 거예요?
릭사엘:고작 이 정도로 작아질 키면 유스 몸에는 뼈가 아니라 밀가루 반죽이 있는 거 아니야? (작게 키득거리며 네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닿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뺨이 발긋하게 달아오른다)
유스텐:(툴툴)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릭사엘:언제는 할아버지 취급해주는 중이라며.
유스텐:지금은 어리잖아요. 난 24살, 릭스는 20살. 맨날 키로 놀리기나 하고...
릭사엘:이걸로 놀릴 때 네 반응이 제일 재밌는 걸 어떡해. 귀여운걸.
유스텐:(찌릿) 자꾸 그러면 나도 놀릴 거예요.
릭사엘:그래? 뭘로 놀릴 건데?
유스텐:(머리에 닿는 네 손을 낚아채고 얕게 손끝을 물어버린다)
릭사엘:(네가 물어버린 손을 움찔거리다가, 충동적으로 네 입술 안쪽을 매만지며) …네가 이러면 내가 무얼 하고 싶어지는 줄 알고 자꾸 이래.
유스텐:우으? 즈, 즘깐만.... (손바닥을 잡아봤자 손가락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까먹는다)
릭사엘:(손끝으로 네 앙증맞은 혀 중앙을 꼭꼭 누르며) ...계속 잡고 있을 거야?
유스텐: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바로 잡던 손을 놔주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릭사엘:(천천히 손을 거두고는 말갛게 웃으며) 얼굴이 토마토가 됐네, 우리 유스.
유스텐:놀리지도 못하게 해, 진짜...
릭사엘:네가 너무 경각심이 없는 거야. 난 가만히 있었는걸.
유스텐:(툴툴거리며 중얼거린다) 어릴 때가 좋았는데. 성교육 수업 때 얼굴 붉히던 꼬마 릭스 말예요.
릭사엘:(피식 웃으며) 그때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유스텐:귀여웠거든요. 살만 봐도 목이 뻣뻣하게 굳어서는.
릭사엘:(키득키득) 예전 걸 다 기억하네. 그때 모습을 다시 보고 싶으면 그만한 충격을 줘야 할걸?
유스텐:그만한 충격... 뭐가 있을지 감도 안 잡혀요.
릭사엘:나라고 알겠어?
유스텐:에휴 - 결국 없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어릴 땐 놀리는 맛이라도 있었는데.
릭사엘:그래도 아직 너보다는 어리잖아. 힘내 봐.
유스텐:(테이블 위로 상체를 푹 엎드려 고개만 위로 들어올린다) 나-빠.
릭사엘:(네 꿍얼거리는 머리통 위를 톡톡 쓰다듬으며) 나빠? 나쁜 릭스야, 나?
유스텐:응. 완전 나쁜 릭스에요.
릭사엘:(과장돤 목소리로) 이를 어쩐다... 어떻게 해야지 좋은 릭스로 돌아갈 수 있어?
유스텐:음... 어른을 어른이라 인정해주고, 장난에 잘 걸려넘어지면? 착한 릭스로 인정해줄게요.
릭사엘:그거 착한 거 맞아? 사심이 너무 들어갔는데?
유스텐:(으쓱) 원래 이런 건 심사위원 마음이거든요.
릭사엘:안 되겠어, 타락한 채로 살아야지.
유스텐:(삐죽) 릭스는 산타 얘기 몰라요? 나쁜 어린이한테는 산타가 안 찾아가듯이, 나쁜 릭스한테는 수호천사가 안 붙을 수도 있거든요.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협박이야, 그거? 잔인한걸. 천사 아니라 악마 아니야?
유스텐:협박이 아니라- 제.안.
릭사엘:하지만 어른을 어른으로 인정하는 건 둘째치고, 장난에 잘 걸려 넘어지는 건 내 의지가 아니잖아.
유스텐:노력을 해야죠!
릭사엘:알았어, 노력해볼게. 대신 유스 너도 더 재밌는 장난을 쳐주는 노력도 해야 한다?
유스텐:'뭐지? 어째 내가 말리는 것 같은 느낌이...' 조, 좋아요.
릭사엘:그래, 그럼 지금부터 시작.
유스텐:지, 지금부터?!
릭사엘:응, 지금부터.
유스텐:난 준비된 장난도 없는데...!
릭사엘:그건 네가 감당할 몫이지 내 몫은 아니잖아. (키득키득)
유스텐:너무해. ... (점점 얼굴을 찌푸리며) 맨날 나 놀리기나 하고, 24살한테 꼬마 꼬마 거리고...!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손등 위로 고개를 묻어 훌쩍인다) 뭐만 하면 다 귀엽다고 하고!
릭사엘:...울어? 진짜로?
유스텐:(코를 훌쩍이는 소리만 낸다)
릭사엘:(네 얼굴을 슬쩍 들어올려 찬찬히 네 양 뺨을 손바닥으로 덮어 매만지며) 우는 줄 알았잖아... 심장 떨어지겠어.
유스텐:(조용히 우는 척을 하다 고개를 들어올려 헤실헤실 웃는다.) 헤헤 - 안 울지롱~
릭사엘:에휴... 장난도. (안심이 되어 피식 웃으며 네 뺨을 조물조물거린다)
유스텐:(얄밉게 메-롱) 릭스가 먼저 노력하라고 했잖아요.
릭사엘:짓궂기는... 내가 널 얼마나 신경쓰는지 알고 이런 장난을 쳐. 이 장난꾸러기야. (네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잡아당긴다)
유스텐:제대로 걸려들었죠? (으-쓱)
릭사엘:...확실히 이 장난이면 평생도 걸려들겠지만, 내 생각 해서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유스텐:(눈치보듯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으응... 알았어요.
릭사엘:잘못했어?
유스텐:...(끄덕끄덕) '나 왜 혼나고 있는 거지?'
릭사엘:(순순한 네가 사랑스러워서 그저 피식거리며) 귀여워 죽겠다니까, 정말.
이런데도 어른 유스라고 불러달라고 고집이나 피우고.
유스텐:(의지를 잃은 듯 테이블 위로 뺨이 짓눌리도록 기대어 웅얼거린다) 장난치는 거 어렵다... 잘 쳐야 하고, 잘 골라야 하고...
릭사엘:(키득거리며 네 풀죽은 머리통에 살짝 키스해준다)
유스텐:(흘긋) 뭐하는 거예요...
릭사엘:애정표현? 아이에게는 주로 이렇게 해주잖아.
유스텐:나한텐 릭스가 아이인데. 24살을 아이취급 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릭사엘:그럼 내가 좀 특별한가 보지.
유스텐:... (힐끔) 이리 가까이 와볼래요?
릭사엘:응? (고개를 갸웃하다가 네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기울인다)
유스텐:(한 손으로 네 고개를 당겨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뗀다.) 꼬마 릭스에게 하는 복수.
릭사엘:(말캉한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 감촉에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제 뺨을 만져보다가, 이윽고 불이 붙은 듯 뺨이 활활 타오른다) 유… 유스…!
유스텐:(뭐가 문제냐는 듯 갸웃거리며) 왜요.
릭사엘:이러, 갑자기 이러면… 안, 안… 안 돼. (숫제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유스텐: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아까는 나한테 키스하면서 아이에게 하는 애정표현 어쩌고 했으면서.
릭사엘:그, 그건 얼굴이 아니었잖아… (울먹)
유스텐:뺨이나 정수리나 - 그게 그거죠. 애정표현인 건.
릭사엘:많… 많이 다르단 말이야…!
유스텐:어떻게 다른데요?
릭사엘:… … 내, 내가… 부끄러워…
유스텐:그럼 안 부끄러운 곳은 어딘데요? 정수리?
릭사엘:(끄덕끄덕)
유스텐:(청개구리 같이 씩 웃으며) 그럼 거기 빼고 하면 되겠다.
릭사엘:장난꾸러기..
유스텐:그러면서 하지 말라고는 안 하면서.
릭사엘:
유스텐:싫으면 안 하고요. 하지 말라는 걸 고집부릴 생각은 없거든요.
릭사엘:…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말했잖아, 너랑 뭘 하든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유스텐:그치만 아까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릭사엘:…안 되지.
유스텐:(제 입술이 닿았던 곳을 검지로 슥슥 문지르며) 그럼 앞으로 안 할게요. 나는 착한 어른이니까.
릭사엘:… (잠시 입술을 떨다가, 달떠오른 눈동자로) 유스 넌… 이런 게 아무렇지 않아? 내가 거리껴지지 않아? 난 과거의 사람이고, 게다가 남자…인데.
유스텐:(눈매가 휘어지도록 미소지으며 너를 올려다본다.) 과거의 사람이든, 남자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내가 당신을 유일무이하게 여기는 건 변함없을텐데.
릭사엘: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감정이 울컥 치받는다) 난… 난 네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 돈도 명예도 안락함도, 심지어 함께 있는 시간마저도. 그게 우리 사이의 강인 걸 알잖아…
유스텐:(위로하듯 네 뺨에 손을 대고 눈가와 함께 어루만져준다) 괜찮아요.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릭사엘:…날 아껴, 유스?
유스텐:응, 많이.
릭사엘:날… 좋아해?
유스텐:... 좋아해요.
릭사엘:…사랑, 해?
유스텐:(슬쩍) 으음 - 아까부터 계속 민망한 질문만...
릭사엘:…물어보지 마?
유스텐:... 릭스는요? 아까부터 계속 나만 대답했잖아요.
릭사엘:(잠시 고민하다가) 알았어, 그러면 물어봐. 대답… 해줄게.
유스텐:(속눈썹을 내리깔다 다시 널 올려다보며) 나를... 사랑해요?
릭사엘:(떨리는 숨을 간신히 들이키며) …응, 아주 오래 전부터.
유스텐:...내가 첫사랑이에요?
릭사엘:(울컥 올라오려는 울음을 누르며) …응, 네가 내 첫사랑이야.
유스텐:하하... (작게 웃음소리를 흘려보내고 울 것 같은 얼굴로 활짝 웃는다)
릭사엘:(상기된 얼굴로 가만히 웃음을 터뜨리는 너를 보며) 왜 그렇게 웃어…
유스텐:'어떻게 기억을 잃고 나서도, 다시 한 번 더 잃고 나서도 모자라 기억을 잃기 전에도 나를 사랑한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냥, 기쁘고... 재밌어서요.
릭사엘:…기뻐?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게?
유스텐:응. 뭐랄까 당신 말하는 게...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서요.
릭사엘:…널 처음 봤을 때부터 두근거렸으니까, 딱히 틀리진 않을지도. 그때는 내 감정이 뭔지 몰라서 헤멨다고는 하지만…
유스텐:신기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을 때부터 두근거렸다는 게...
릭사엘:그건 나도 그래. 음… 이런 걸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부르는 거려나.
유스텐:(장난스런 투로) 당신도 참 못 말려요. 자주 못 보면서 제대로 꿰여가지고는 항상 내 생각을 하고.
릭사엘:…내가 네 초상화가 소실된 후에 다시 그렸다는 사실을 알면, 아주 기겁하겠어.
유스텐:뭐라고요 - ?? 그건 살롱 게임 때도 말 안 해줬던 거잖아요.
릭사엘:살롱 게임을 끝까지 했으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둘 다 잠들었었잖아.
유스텐:끄응 - 그거야 어쩔 수 없었는걸...
릭사엘:게다가 또 3년만에 왔지. 좀 자주 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손을 뻗어 네 말랑한 볼을 살짝 잡아당긴다)
유스텐: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래도...
릭사엘:그래도 결국은 네가 과거를 여행하는 시간이니까,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할 거 아냐.
유스텐:적당히 잘 건너뛰라고만 했지, 제대로 된 사용법은 나도 잘 몰라요.
릭사엘:누가 적당히 건너뛰라고 헀었는데?
유스텐:'아. 이런... 또 말실수했다.' 으음 - 과거로 가는 물건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슬쩍)
릭사엘:언제는 길 가다가 주웠다며.
유스텐:그 그러니까... 길 가다 주워서! 어쩌다 보니 마침! 물건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릭사엘:그래? 정말 대단한 우연이네. (딱히 믿지는 않지만 적당히 장단을 맞춰줘야 네가 안심하겠지. 어쨌든 중요한 것도 아니고…)
유스텐:(삐질삐질...) '넘어가나? 넘어간 거겠지?' 어쨌든 방법을 알았으면 당연히 써먹었을 거란 뜻이에요.
릭사엘:음, 네가 9-10개월을 건너뛰었을 때와 3년을 훌쩍 건너뛰었을 때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답이 나오지 않을까.
유스텐:특별한 점이라면... 3년을 건너뛰기 직전엔 당신이 항상 울고 있었죠?
릭사엘:아… 내가 그랬던가?
유스텐:음... 아무래도 내 영향만 받는 게 아니라, 당신의 영향도 받는 것 같아요. 내가 잠들지 않고, 당신이 먼저 잠들었을 때도 강제로 이동됐던 걸 생각하면.
릭사엘:맞아, 그랬었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정리하면 시간을 건너뛰는 촉발 조건은 우리 둘이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거나 둘 중 한 명이 의식을 잃는 순간이겠네.
유스텐:응. 3년을 건너뛰는 건... 정신적 충격에 관련된 것 같아요.
릭사엘:그건, 듣기만 하면 꼭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들리네.
시간 여행을 할 때의 감각은 어때? 잠에 드는 것 같다거나, 끌려가는 기분이라거나. 시간을 건너뛴 직후에 시야가 잠들다 깬 것처럼 천천히 밝아진다거나.
유스텐:지금 나열했던 세 개 다 느껴요.
릭사엘:그럼, 한 가지 가설이지만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유스텐:어떻게요...?
릭사엘:조금 이따가 침실로 올라가서 알려줄게.
유스텐:(끄덕) 응.
당신들이 가만히 시선을 교환하다가 햇빛 비치는 정원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하인이 조용히 거실로 들어옵니다.
은쟁반 위에 보드라운 차 향기와 함께
하얀 연기가 살며시 피어오르고
그 수면 위에 고인 햇살이 반달처럼 이지러집니다.
하인은 당신들이 앉은 테이블 위에
흰 린넨 테이블보를 먼저 깔고는
잔 두 개를 내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다과 세팅을 시작합니다.
금빛 테두리의 접시 위에 버터 마들렌, 라즈베리 타르트,
그리고 아몬드가 콕콕 박힌 쿠키 몇 개가 놓입니다.
하인이 약간의 의아함과 함께 내려둔 잔을 바라보고 있으면
릭사엘은 슬며시 밀크티가 든 잔을 당신 앞으로 내밀고
하인에게 퇴근을 명령합니다.
하인은 잠시 의아해 하다가, 이내
알았다는 의사 표시와 함께 거실을 나서고
퇴근 준비를 하는지 복도 너머에서 달그락거리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타운하우스의 저택이 고요에 물듭니다.
릭사엘:(가만히 너를 보고 웃으며) 따뜻할 때 들어.
유스텐:(밀크티가 들은 잔을 두 손으로 들어올려 호로록 마신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뺨에 닿아 부스러지며 얼굴이 옅게 달아오른다.) '달다...'
릭사엘:(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너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입에 맞아?
유스텐:(끄덕끄덕)
릭사엘:(동그란 네 머리통을 쓰다듬어주며) 많이 먹어, 유스. 너 주려고 준비한 거니까.
저녁엔 뭘 먹고 싶어?
유스텐:'이젠 진짜 달달한 것만 주네...' (머쓱)
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요리가 뭐가 있지?' 새, 샌드위치?
릭사엘:그건 아침이나 점심 식사잖아.
유스텐:그러면... 스프...? (힐긋)
릭사엘:그건 애피타이저고.
유스텐:스, 스튜...?
릭사엘:그건 괜찮네. 또?
유스텐:또요???
릭사엘:응, 처음 차려주는 건데 많이 먹이고 싶어서.
유스텐:어... 시, 식빵과 버터?
릭사엘:스테이크 구워줄까?
유스텐:(눈을 휘둥그레뜨며) 스테이크까지요??
릭사엘:그렇게 놀랄 것 있어?
유스텐:하인은 다 퇴근한 거 아니에요?
릭사엘:응, 퇴근했지. 걱정 마, 금방 만드니까. 세간에서는 배운 계급의 사람이 직접 요리하는 걸 경계하지만... 이 타운하우스에서 내가 고용한 이들은 모두 기혼인지라, 내가 일 없으면 퇴근을 일찍 시켜주거든. 덕분에 저녁은 내가 차려먹을 때가 많아. 물론 낮에 하인들이 해두고 간 음식으로 때울 때도 잦지만 말이야.
유스텐:'릭스가... 요리를...?! 잘할 수 있으려나... ' 그렇구나...
릭사엘:(피식 웃으며) 얼굴을 보니, 내가 영 못 미더운 표정이네.
유스텐:(뒷머리를 긁적이며) 으음 - 미안해요. 전혀 상상이 안 가서.
릭사엘:그 정도야? (키득거리며) 유스 네가 못미덥다고 하니 오히려 상차림에 힘을 줘야겠네.
유스텐:'그야... 현대의 릭스도 요리하는 모습은 한 번도 안 보여줬는걸...' (쿠키를 와그작 먹으며) '먹고 죽기야 하겠어? 이미 목 물어뜯겨서 죽어본 마당에.'
릭사엘:(쿡쿡 웃으며 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닦아준다) 다 묻히고 먹네.
유스텐:쿠키가 너무 바삭해서 그런 거거든요.
릭사엘:그래, 그래. (가만히 손가락을 닦기 위해 손수건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제 입가에 가져가 가볍게 핥는다)
유스텐:그, 그걸 왜 먹어요!?
릭사엘:응? 손수건이 없길래.
유스텐:그래도 먹던 거를...
릭사엘:네가 먹던 건 불결하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괜찮아.
유스텐:(두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댄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다) 내가 안 괜찮다고요...
릭사엘:(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안 괜찮다니. 내가 잘못한 거야?
유스텐:(손틈 사이로 널 보며) 부끄러워요.
릭사엘:(잠시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바라보다가, 의자를 조금 네 옆으로 끌어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네 손을 치우며)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고 그래.
유스텐:(눈을 꾹 감고) 반대로 생각해보란 말예요!
릭사엘:음- 네가 그랬으면 나도 좀 부끄러웠을지도. 하지만 내가 당한 게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는걸.
유스텐:(두 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다가 네 손을 잡아다 네가 핥았던 손가락을 핥는다) 이런 거라고요...!
릭사엘:(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아하하...!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야.
유스텐:으으 - 난 지금 되게 진지한데...!
릭사엘:(설렘에 젖은 어린 아이 같은 얼굴로 네 입술을 문지르며) 유스 넌 이런 거에 나보다 훨씬 거리낌이 없구나?
유스텐:그런가... (슬쩍) 당신이랑 별로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해요.
릭사엘:나? 난 그래도 아직까진 신사적으로 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스텐:릭스는 원래 신사적인 거 아니었어요?
릭사엘:...그렇긴 한데, 너랑 있으면 충동적으로 굴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유스텐:'충동적으로 굴은 적이 있었나?' (갸웃거리며) 예를 들면요?
릭사엘:오늘 강의를 무단결석 한 것도 그렇고... (네 입술주름을 찬찬히 더듬으며) ...지금 너랑 더 닿고 싶어하는 것도, 그렇고.
유스텐:'어... 이거, 키스하고 싶다는 뜻인가? 근데 릭스는 이제 막 20살인데 그런 걸 허락해도 되는 건가? 현대의 릭스한테는 뭐라고 설명하지? 이거...혹시 허락하면 바람피는 건가?' (같은 생각을 뒤늦게서야 하며 말이 없어진다)
유스텐:아, 그러네. 헉 - 그럼 내가 타이밍 안 좋게 와서 개근은 넘어간 건가...
릭사엘:...지금 그게 중요한 거야? 너도 참... (피식 웃으며 미련 가득한 손을 뗀다)
유스텐:(말없이 키득거리며 웃음 소리만 낸다)
릭사엘:(타르트를 집어 네 입가에 내밀며) 너 때문에 내가 못살겠어.
유스텐:(네 손에 들린 타르트를 그대로 한입 먹으며) 왜요?
릭사엘:바보라서.
유스텐:바보 아니거든요 -
릭사엘:바보 맞잖아.
유스텐:(고개를 휙 돌리며) 흥. 릭스, 진짜 바보 못 봤구나?
릭사엘:(괜히 놀리듯) 유스가 제일 바보 아니었어?
유스텐:나는 평범한 편이라고요!
릭사엘:평범한 것치고 눈치는 많이 없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지.
유스텐:그건... 으음... '현대로 돌아갔을 때, 어떻게 설명하라구... "20살이 된 당신의 첫 키스를 빼앗았어요. 에헷 - 동일인물이니까 괜찮죠?" 이러라고?'
릭사엘:(마저 야금야금 너에게 남은 다과를 먹인다)
유스텐:(얌전히 네가 주는대로 전부 받아먹는다. 조금 빵빵해진 볼을 오물거리며 눈을 가늘게 뜬다.) '너무 복스럽게 먹이는 거 아니야?'
릭사엘:(잘 먹는 너를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웃는다) 자, 목 막히지 않게 밀크티도 마시고. (잔을 내밀어 네 손에 쥐여준다)
유스텐:(꿀꺽꿀꺽 - ) ... 너무 나만 먹이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 저녁도 못 먹겠는데.
릭사엘:스튜 끓이려면 1시간 반은 걸리니까, 그 전에는 소화될 거야. (밀크티 잔여와 쿠키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네 모습이 사랑스러워 다시 한번 네 입술을 손가락으로 닦아주고는 쪽 핥아먹는다)
유스텐:(화끈 - ) 아까부터 왜 자꾸 핥는 거예요, 진짜...
릭사엘:내 첫사랑이 눈치가 없는 것 같아서, 이거라도 먹었어.
유스텐:모르는 게 아니라...! (충동적으로 내뱉다가 흡 - 하고 숨을 들이키며 말이 없어진다)
릭사엘:모르는 게 아니면?
유스텐:(눈치...) 눈치없는 거 맞습니다...
릭사엘:(말끔해진 손가락으로 네 머리카락을 슥슥 쓸어주며) 그래. 다 먹었지, 이제? 테이블 치워도 될까?
유스텐:으응...
릭사엘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 당신이
영 사랑스럽다는 듯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테이블을 정리합니다.
은 쟁반 위에 빈 접시와 잔들이 놓이고
테이블보를 그 옆에 담은 릭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향합니다.
거리가 멀어져 또 시간을 건너뛸세라 그를 쫓아가면
릭사엘은 부엌의 작은 한 켠 대야에 그것들을 내려놓고는
구석에서 앞치마를 꺼내 착용합니다.
제법... 현모양처 같은 모습이네요.
유스텐:'현대에서도 저런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는데, 역시 과거로 오길 잘했다. 귀여워...' (빤 - 히)
릭사엘:잠깐 의자 가져와서 기다릴래? 최대한 금방 저녁 차릴게.
유스텐:응! (빠르게 의자를 들고 바로 뒤에 놓고 구경한다)
당신이 신나게 의자를 끌어와 근처에 앉으며
릭사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릭사엘은 키 차이로 인해 낮은 조리대 위로 적당한 크기의 나무 받침대를 가져와 놓고는
저장실에서 갖가지 채소와 고기를 가져와 썰기 시작합니다.
칼질 소리가 제법 일정합니다.
유스텐:오... '생각보다 ... 잘하잖아?'
재료 손질을 마치고 릭사엘이 가볍게 손을 씻으면
이윽고 벽난로식 화로에 불씨가 타오르고
채소와 고기가 혼합된 달큰한 냄새가 뭉근히 퍼집니다.
유스텐:(킁킁) '좋은 냄새... ...잠깐, 설마 1시간 반 동안 단순히 끓이는 게 아니라 저어야하는 거면 어떡하지?'
(네 등을 소심하게 콕콕 찌르며 눈을 데구르르 굴린다) 릭스으... 음... 혹시 스튜... 한 시간 반 동안 저어야하는 거예요?
릭사엘:응? 응. 그렇지?
유스텐:'이럴 수가.......' 너무 번거로운 거 아니에요?!
릭사엘:너 먹일 걸 허투루 할 순 없잖아. 괜찮아, 중간중간 저어주면 돼.
유스텐:그래도... 힘들 것 같은데...
릭사엘:힘들기는. 걱정도 많아. (피식 웃으며 너를 돌아본다) 그보다 심심하지 않겠어? 나만 보고 있잖아 너.
유스텐:달리 할 것도 없어서 괜찮아요. '릭스 전공서적을 읽고 싶은 마음도 없고...'
릭사엘:...떨어지면 안 된다는 리스크가 생각보다 크네. 집이라도 구경하고 있으라고 하면 나도 마음이 편할 텐데.
유스텐:(도리도리) 당신 구경하는 것도 재밌어서 괜찮아요.
릭사엘: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주철 냄비에 야채와 고기를 한참 볶다가 육수를 붓고 가볍게 간을 한 후 약불 스토브로 옮긴다)
유스텐:(툭) 이렇게 보니까 릭스, 현모양처 같아요.
릭사엘:(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큰 현모양처가 어딨어.
유스텐:여기? 어쩐지 "다녀왔어-" 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릭사엘:내가 현모양처고, "다녀왔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면, 내 배우자가 너인 거야?
유스텐:음 -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죠?
릭사엘:그거 정말 재밌는 상상이네. (저장실에서 마저 소고기와 콜리플라워를 가져와 일정하게 썰어내고는, 물기와 핏물을 제거한 뒤 빈 스토브에 팬을 먼저 달군다)
유스텐:(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아니지, 매번 나한테 꼬마니 뭐니 어린 애 취급하니까 배우자보단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엄마는... (상상만 해도 낯설어서 고개를 돌리며) 아닌 것 같고.
릭사엘:(키득거리며) 그러고보니 전에도 나보고 아빠라고 부른 적 있었잖아. 기억 나?
유스텐:살롱 놀이 할 때였나? 대충 기억나요.
릭사엘:(계속 웃으며) 본인 정신은 스물네 살이라고 하면서 나한테 태연하게 아빠라고 부르는 게 재밌었는데.
유스텐:그거야 장난이죠. 릭스도 참...
릭사엘:장난이어도 그 장난은 정말 신박했어. (달구어진 팬에 버터를 올려 야채부터 굽고는, 온도를 적당히 낮추어 소고기를 올린다)
유스텐:'미래의 당신이 그 단어 듣고 정신을 못 차리던데.' ... 그나저나, 타운하우스가 꽤 크네요. 적당한 집에 혼자 사는 줄 알았는데.
릭사엘:아무래도 아직까지는 공작 각하께서 내 후견인이신지라, 타인 시선에 안 좋아보일 만한 규모로 지내지는 않아.
유스텐:그렇구나... 공작님과는 사이가 좋아요?
릭사엘:잘 대해주시긴 하지만, 바쁜 분이셔서 얼굴을 자주 뵙지는 못하지.
유스텐:아쉽다. 조금 궁금했는데...
스테이크가 구워지는 고소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냄새와
달큰한 채수와 고기가 익어가는 냄비 속의 보글보글 소리가
정겹게 부엌을 채웁니다.
릭사엘은 간간히 냄비를 저으며 간을 보고
찬장에서 빵을 꺼내 도톰하게 자르고는
상온에 둔 버터를 얇게 펴발라 화로 옆의 오븐에 밀어넣습니다.
유스텐:'나 혹시...남편이 해주는 밥 먹으러 온 사람인가? 과거를 보러 온 게 아니라?'
릭사엘:(열심히 요리를 하다가 문득 말이 없어진 너를 돌아보며) 거의 다 됐네. 마실 건 뭘로 줄까?
유스텐:어, 어... 시원한 물 한 잔...?
릭사엘:이제 성년이겠다, 애플 사이다 한 잔은 어때?
유스텐:좋아요. 마실래요.
릭사엘:알았어, 그럼 한 잔씩 준비할게.
유스텐:'20살의 릭스랑은 처음으로 같이 마셔보네.' 음? 근데 살롱 게임 때는 술 다시는 입에 안 댈 거라 하지 않았어요?
릭사엘:음,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상류사회에서 술 없이는 어울리기가 영 힘들더라고. 그래서 배우기로 마음 먹고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아서 익숙해지는 중이야.
유스텐:(중얼) 이게 바로 어른이 되는 과정인가... (탄식하며) 아 - 차와 주스만 마시던 릭스도 귀여웠는데.
릭사엘:차랑 주스는 여전히 좋아하지. 아쉬워할 것 없어.
유스텐:이제 술을 더 자주 마시게 될 거잖아요. 우으... 나의 작고 귀엽던 어린이 릭사엘이... 어른이 되어버렸어...
릭사엘:그렇다고 싫진 않으면서.
유스텐:당연히 싫지는 않죠. 그저 귀여운 모습을 못 봐서 아쉬울 뿐이지.
릭사엘:귀엽게 굴어줘?
유스텐:응? 어떻게요...?
릭사엘:글쎄. 잠시 생각을 좀 해볼게.
릭사엘은 스튜를 조금 더 휘젓고 스테이크의 익힘 정도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스토브의 마개를 닫아 불을 끕니다.
그리고는 조리된 음식을 접시에 플레이팅하듯 단정하게 담고는
천천히 트레이 위에 올리네요.
녹진하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스튜 두 그릇과
파슬리와 타임이 올려진, 구운 채소 가니쉬를 곁들인 스테이크.
그리고 갓 오븐에서 꺼낸 버터 발린 빵과 시원하게 잔에 따른 애플 사이다 두 잔.
그새 만들었다고 보기에 제법 푸짐한 식사 구성입니다.
릭사엘:(묵직한 트레이를 손에 든 채로) 다이닝룸으로 갈까?
유스텐:(다급하게 의자에서 일어서서) 응. 나도 같이 들어줄게요.
릭사엘:괜찮아, 유스. 가자.
릭사엘이 먼저 성큼성큼 부엌을 나서는 통에
놓칠세라 열심히 따라가면
아직 촛불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식탁 위가 비칩니다.
릭사엘은 식탁 위에 트레이를 먼저 내려두고는
성냥불을 밝혀 촛불에 하나씩 불을 밝히고
환기가 잘 되도록 작은 창문을 열어둡니다.
릭사엘:(식탁에 다가와 의자를 끌어당기며) 여기 앉아, 유스.
유스텐:(어색하게 의자에 앉으며) '이 상황... 요리사가 릭스란 것만 빼면 익숙한걸.'
릭사엘:(의자에 앉아 고스란히 드러난 정수리에 짧게 입맞추고는, 식탁 위로 차곡차곡 음식을 내려둔다) 아, 맞다. 후식도 같이 가져올 걸 그랬나.
유스텐:후식도 있어요?
릭사엘:응, 치즈 슬라이스에 잼 올려서 주려고 했지.
유스텐:지금 나온 걸로도 엄청난데..
릭사엘:그래? 음, 그러면 이거 먹다가 부족하면 더 가져오자.
유스텐:응. (네게 손을 내밀며) 먼저 들어요. 릭스가 다 했으니까.
릭사엘:(맞은 편 의자를 끌어 앉으며) 난 네가 먹는 게 보고 싶어. 어서 먹어봐. 난 요리하면서 간을 봐서, 그렇게까지 배가 고프진 않거든.
유스텐:그럼... (식기를 들어 스튜를 한입 먼저 떠먹는다) '뭐, 뭐야???' 맛있어...
릭사엘:(살짝 긴장하고 있다가 네 말에 방긋 웃으며) 맛있어? 다행이다, 입에 맞아서. 많이 먹어. 고기 좋아한다고 해서 고기 많이 담았어.
유스텐:사, 사기 아니에요? 이건...
릭사엘:(키득키득) 요리 못한다고 한 적은 없잖아, 나.
유스텐:'못하는 거 많다며........'
릭사엘:(네 긍정적인 반응에 안심하며 저도 우아하게 식기를 들어 식사하기 시작한다) 스테이크는 어떤지도 맛 좀 봐줘. 난 보통 레어로 먹는데, 네 취향을 몰라서 미디엄 레어로 굽긴 했어.
유스텐:스테이크를 많이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정도면 괜찮을 거예요. (현대의 릭스를 보고 배운 솜씨로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먹어본다) 이것도 맛있어...
릭사엘:많이 먹어. 너 먹이려고 차린 거니까.
유스텐:'아니, 과거까지 와서 이런...호화로운 식사를 해도 되나? 이런 건 예상 못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쏙쏙 야무지게 먹는다)
릭사엘:(중간 정도 먹다 말고 네가 식사하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유스텐:(어깨를 늘어뜨리며 눈가가 휘어진 채 냠냠거리다 꿀 떨어지는 시선에 멈칫한다.) 왜 식사 안 해요...
릭사엘:너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기분이라.
유스텐:그렇다고 진짜 배가 차는 것도 아니면서.
릭사엘:그렇긴 하겠지만, 정말로 배부른 기분인걸.
유스텐:계속 보면 민망하단 말예요...
릭사엘:(피식) 알았어. 나도 마저 먹을게. (다시금 식기를 움직여 정갈하게 식사한다)
유스텐:계속 그러면, 나도 막... 이렇 - 게 빤히 볼 거예요. (빤-히)
릭사엘:… (네 말에 조용히 식기를 대각선으로 내려두며) …솔직히 난 이렇게 너랑 마주보고 있기만 해도 좋아서, 별 소용은 없을 거야.
유스텐:불공평해요! 왜 나만 타격이 있는 거지...
릭사엘:그러게나 말이야. (옆에 놓인 애플 사이다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하고 조금 마실까?
유스텐:(삐죽이면서도 제 몫의 사이다 잔을 들어올린다) 그래요.
유리잔과 잔이 맞부딪히며
청명한 팅 소리를 냅니다.
릭사엘은 연신 미소지으며 입을 축이고는
당신을 달큰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네요.
유스텐:(민망함에 볼을 붉히며 눈을 돌린다) 눈에서 꿀 나오겠어요, 진짜...
릭사엘:(키득거리며) 그래? 채취해서 팔 수 있을 것 같아?
유스텐:(무슨 헛소리냐고 하려다 진지하게 고민한다) '잠깐... 교주님의 눈에서 나온 꿀? 이거... 엄청 비싸게 팔리는 거 아니야?' 흠... 상품화 할 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진 않아서 불가능할 것 같아요.
릭사엘:그래? 아쉽네. (피식피식 웃으며 잔을 기울인다)
유스텐:(더 말하지 않고 같이 잔을 기울이며) '뭐야? 이거... 되게 맛있잖아?!' (멈추지 않고 꿀꺽꿀꺽 전부 들이킨다.) 크으 -
릭사엘:(네가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황망하게 잔을 내려두며) 그러다 금방 취해, 유스.
유스텐:에이 - 그렇게 쓰지도 않고, 주스 같은데요?
릭사엘:그거야 그렇지만... (보기보다 술을 잘 마시는 건가?) ...알았어, 더 마시고 싶으면 말해. 더 가져다줄게.
유스텐:그러면! (한 치의 고민도 사양조차 하지 않고 검지를 들어올린다) 한 잔 더 -!
릭사엘:(벙찐 표정으로 너를 바라보다가 키득키득 웃으며) 알았어, 잠시만.
(부엌과 연결된 입구에 놓아둔 술병을 마저 가져오며) 자, 잔 이리 줘봐.
유스텐:(척 - ! 하고 자신있게 잔을 내민다)
릭사엘:(그런 네가 귀여워 조심스럽게 잔에 술을 따른다. 또 꿀꺽꿀꺽 마실 수도 있으니까... 반 정도만 일단)
유스텐:(히죽히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벌써 느른해진 눈으로 잔을 빤히 바라본다.) 색이 너무 영롱해요.
릭사엘:그래? 그럼 이번에는 감상하면서 천천히 마셔. 속 버릴라.
유스텐:그럴까요?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한 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남은 한 손으로 잔을 들어 빙빙 돌린다) 헤헤...
릭사엘:...? (왜 갑자기 저렇게까지 기분이 좋아보이지? 설마...) 잘 웃네. 벌써 취한 건 아니지?
유스텐:(미간을 구긴 채 볼을 살짝 부풀리며) 나를 뭘로 보는 거예요? 나 24살이거든요? 릭스나 취하지 않게 조심하라구여...
릭사엘:(어쩐지 영...) ...알았어. 어서 저녁 마저 먹자. 식겠다.
유스텐:(뭐가 그렇게 재밌고 기분 좋은 건지 혼자 계속해서 히히, 흐흐 -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식사한다)
릭사엘:(이것 참 큰일났네... 금세 취한 것 같은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식사하며 접시를 비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득하던 식탁 위 음식들이
접시 바닥을 드러내며 빕니다.
릭사엘은 당신과 함께 먹은 식기를 트레이 위에 정리하다가
슬쩍 다가와 당신의 달아오른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트레이를 잠깐 구석에 밀어둡니다.
릭사엘:후식 필요해, 유스? 가져다줄까?
유스텐:(두 손으로 볼이 꾸욱 눌릴 정도로 턱을 괴며 몽롱한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우응... 후식 먹을래...
릭사엘:(귀여워...) 알았어, 잠시만.
릭사엘은 혹여나 떨어져 당신이 사라질세라
빠른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장식을 위한 나무 트레이 위에
체다와 고다 치즈가 얇게 썰려 플레이팅 되어 있고
그 위에 달콤한 살구잼이 부드럽게 발려 있습니다.
식후 입가심을 위해서인지
작은 체리도 몇 개 놓여있네요.
릭사엘:(네 앞에 플레이트를 내려두며) 금방 왔지?
유스텐:응~!! 눈 한 번 감았다 떴는데 당신이 왔어요. (눈을 가늘게 뜨며) 혹시... 벌써부터 초능력을 쓸 줄 아는 거예요?
릭사엘:응? 초능력이라ㄴ... (술김에 하는 네 말이 그저 사랑스러워서, 키득키득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기로 한다) 어떻게 알았어?
유스텐:그야... 지금 보여줬잖아여... (헤실헤실 웃으며) 비밀은 지켜줄테니까아 - 걱정 말아여!
릭사엘:(연신 키득거리며) 고마워, 유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게 알려지면 잡혀갈 수도 있거든-
유스텐:(너를 확 끌어안고 네 품안에서 이마를 비빈다) 안 돼... 그건, 시러...
릭사엘:(애교부리는 네 행동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안온한 빛으로 너를 잔잔히 바라보며) 우리 유스, 그건 싫어? 걱정 마, 잡혀가는 일 없을 거야. 이건 유스밖에 모르는 비밀이니까. (네 귀여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쪽 입맞춘다)
유스텐:(여전히 널 놔주지 않고 훌쩍이며) 내가, 꼭 - 비밀 지킬게...
릭사엘:(귀엽고 재밌어서 연신 웃으며) 응, 유스 믿어. (네 머리칼을 더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다가 천천히 네 품을 떼어내고는, 플레이트 위의 체리 꼭지를 꼼꼼히 떼고 포크를 네 손에 쥐여준다) 후식 먹고 싶다고 했지? 어서 먹어봐.
유스텐:우응... (포크를 모든 손가락으로 감아 꼭 쥐고 플레이팅 된 음식을 통으로 푹 - 찍어 한입에 넣는다.)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네 머리칼을 쓸어준다) 입에는 맞아? 전에도 이렇게 먹어본 적 있어?
유스텐:전에? 으음 - (눈을 꾹 감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이... 근데 - 이거 맛있다...
릭사엘:그래? 우리 유스 맛있어?
유스텐:응 - !!! (치즈와 체리를 푹 - 푹 - 포크에 전부 꽂아 네게 권한다) 너도 먹어 -
릭사엘:(푹푹 포크에 찍힌 음식을 바라보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고는 조심스럽게 네가 내미는 음식을 입에 문다. 그리고는 오물오물 씹으며) ...음, 평소에 먹던 방식이랑은 다른데 맛있네.
유스텐:그래 - ? (히죽히죽 웃으며 턱을 괸다) 맛있지 - ? 나도 알아... 나도 먹었으니까...
체리 보니까 생각난다. 내 친구가 해준 말인데 - (네가 딴 체리 꼭지를 남은 한 손으로 가리키며) 저거 묶을 수 있으면 키스도 잘하는 거라고 그랬다?
릭사엘:...? 그런 얘기가 있어? (근데 저걸 어떻게 묶는다는 거지?)
유스텐:(끄덕끄덕) 응 - ! 입 안에 넣고 혀로 막... 요렇게 저렇게 하면 묶을 수 있대. (눈이 감길 정도로 키득거리며) 나는 그거 듣고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니까?
릭사엘:넌 할 수 있어?
유스텐:(도리도리) 시도도 안 해봤어. 그거 들었을 당시에 애인도 없는데 저거 할 줄 알아서 뭐해 - ?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그것도 그렇네... 음, 그럼 우리 지금 해볼까? (자신은 없지만서도)
유스텐:그럴까? 마침 할 것도 없으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릭사엘:그래. (체리 꼭지를 들어다 네 입에 하나 살짝 올려주고, 자신도 하나 집어 입에 문다)
릭사엘:
민첩
기준치:60/30/12
굴림:75
판정결과:실패
유스텐:
민첩
기준치:55/27/11
굴림:11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릭사엘:(이리저리 혀를 굴려보다가) 이거 어떻게 하는지 영 모르겠어... (입에서 대충 말린 체리 꼭지를 꺼내, 부끄러운 듯 내려놓는다)
유스텐:(오물거리며) 이거 제대로 된 거 맞나 - ? 잘 됐어? (라고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혀를 내밀어 제대로 묶인 체리 꼭지를 보여준다)
릭사엘:(고개를 갸웃거리며 네 혀에 빼꼼 올려진 체리 꼭지를 들어보고는) ... 어떻게 한 거야? 신기하네...
유스텐:(히죽히죽 웃으며) 나 재능있나봐.
릭사엘:(네 침에 젖은 체리꼭지를 옆에 내려두고는, 기분 좋아 보이는 네 양뺨을 쥐며) 그러게, 유스 재능 있네. 타고 났나 봐.
유스텐:(네 손에 뺨을 비비며 웃는다) 헤헤 - 천재 유스님이라고 불러줘 -
릭사엘:(히죽 웃으며) 응, 천재 유스님.
(네 말랑한 뺨을 매만지며 조금 얼굴을 붉힌다)
유스텐:(네 뺨 위로 손을 얹으며) 너, 취했어? 얼굴이 빨개...
릭사엘:취, 취하기는... 이건... (잠시 눈꺼풀을 감았다가 뜨며) ...널 보고 있어서 그런 거야.
유스텐:왜 - ? 난 마시는 것도 아닌데... 날 먹은 적도 없잖아, 너.
릭사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스... (얼굴이 황망하게 달아올라 열이 난다)
유스텐:말 그대로인데... 보기만 하는데 어떻게 취해??
릭사엘:(볼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내가 취한 사람 같아?
유스텐:응... 얼굴이 엄 - 청 빨개졌어.
릭사엘:그건...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너한테 취해 있어서 그래.
유스텐:(반눈을 뜨며 손가락으로 널 가리킨다) 그거... 큰일이잖아 - ! 괜찮은 거야?
릭사엘:...? 큰일이라니, 왜?
유스텐:그야... 날 볼 때마다 취하면... 안 좋은 거 아니야? (혼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린다) 아니, 좋은 건가...? 취하면 기분 좋으니까... 그치만 어지러우니까 안 좋은 거 아닌가...?
릭사엘:(이상하고도 귀여운 논리를 펼치는 네가 그저 사랑스러워, 네 턱끝을 살짝 들어올리고는 이마에 입 맞추며) ...그렇게 들으니까 정말 큰일이네. 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유스텐:(잔뜩 취해서, 평소보다 더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보통 알콜 중독에 걸리면 술을 멀리 한다잖아. 그럼... 나도 멀리 해야 하는 거 아냐?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그런 거야? 어떡하지... 난 오래 전부터 너만 보면 이랬는데. 어쩌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도 몰라.
유스텐:(여전히 풀이 죽은 얼굴로 널 올려다보며) 그럼 어떻게 하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릭사엘:글쎄... (귀여운 소리만 뱉어내는 네 입술을 좌우로 쓸어보며) 나도 다른 것에 중독이 되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잘 모르겠어.
유스텐:(입술을 매만지는 손을 딱히 저지하지 않고 속눈썹을 내리깐다) 나도 중독 경험은 없어서...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해...
릭사엘:(키득키득 웃으며)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해. 우리 꼬마 유스, 착해서 탈이라니까. (네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넘겨주고는 마지막처럼 이마에 입맞춰주며) 후식은 다 먹은 거야? 올라가서 쉴래?
유스텐:응... 배불러... (휘청휘청 일어나며) 치우는 거 도와줄게.
릭사엘:아니야, 트레이에 모아서 올려두면 내일 하인들이 와서 설거지 하고 정리해줄 거야. (휘청거리는 네 몸을 받치며) 유스는 나 따라서 올라가자. 술 취해서 어지럽지? 내가 데려다줄게.
유스텐:(삐죽) 안 취했어어 -
릭사엘:알았어, 우리 아가. 하나도 안 취했어, 안 취했어. (비틀거리는 네 몸을 품에 안아 들어올리고는, 엉덩이를 토닥인다)
유스텐:또 애 취급이야? 고집불통... (꿍시렁)
릭사엘:애 취급 아니면, 어른 취급해줘?
유스텐:응... 아니, 그리고 난 원래 어른이라니까...
릭사엘:그런가. 아직 한참은 더 커야 할 것 같은걸. (너를 품에 단단히 안고는 천천히 복도로 나선다)
유스텐:이미 다 큰 건데 여기서 어떻게 더 크라구...
릭사엘:그럼 평생 아이로 사는 거지. (네 어깨에 가볍게 턱을 기대고 뺨을 맞대어 비빈다)
유스텐:그런 게 어딨어? 바- 보.
릭사엘:어디 있긴, 여기 있지 내 사랑. (너를 품에 안은 채 네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유스텐:내 사랑...?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와 시야 속에서 문득 헷갈리기 시작한다) '어... 나 혹시, 현대로 돌아온 건가? 아니면 내가 꿈을 꾸는 건가?'
고요하게 잠든 계단과 복도를 건너면
릭사엘이 당신을 품에 안아든 채 침실의 문을 엽니다.
거실과 마찬가지로 라벤더 향기가 나는 방이네요.
열린 창문 사이로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들어와
흰 커튼을 나풀거리고
작은 벌레 소리가 귀를 간지럽힙니다.
릭사엘은 당신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있다가
이번에도 당신이 놀라지 않도록 침대에 부드럽게 앉혀주고는
천천히 당신의 옷을 갈아입혀주기 시작합니다.
릭사엘:(네 옷 단추를 하나씩 풀며) ...피곤하지? 편히 쉴 수 있게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줄게. 잠시만 있어.
유스텐:(단추를 벗겨주는 손길이 익숙해서, 네 모습이 현대의 너와 겹쳐보인다. 과거를 여행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저를 기다리고 있을 현대의 네가 떠올라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여긴... 과거인 걸까, 아님 현대인 걸까. ) 릭스...
릭사엘: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가만히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보며) 왜 그래?
유스텐:(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에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폭발한다.) 이리 가까이 와줄래요?
릭사엘:(영문을 모른 채 울먹거리는 네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반쯤 안아주며) ...무슨 일 있어, 유스?
유스텐:(두 팔로 힘없이 너를 끌어당기며 훌쩍인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갑자기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릭사엘:(당연히 제 곁을 떠나 있는 동안이라고 생각하고) ...미안하기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네 등을 마주 껴안고 부드럽게 네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려준다)
유스텐:(고개를 들어올려 눈물 젖은 얼굴로 너를 바라본다) 내가... 흑, 밉지 않아요?
릭사엘:(훌쩍이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떼며) ...내가 널 미워하는 일은, 지구가 반으로 쪼개어진다고 해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손끝으로 상냥하게 네 눈물 젖은 눈가와 뺨, 광대를 매만지며 애처롭게 웃는다)
유스텐:(입술이 잘게 떨리고 눈을 반쯤 구기며 목구멍에서 차오르려는 숨을 한 번 참아낸다. 그리운 이를 만난 것처럼 네 뺨 위에 손을 올리며) 키스해줄래요?
릭사엘:(예상 밖의 노골적인 부탁에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네 턱을 부드럽게 당겨올려 천천히 고개를 낮춘다. 떨려오는 속눈썹 사이로 수줍기만 한 네 얼굴이 보이자, 심장이 폭주하듯 날뛴다. 이윽고 잠시 후 말캉하게 입술에 닿자, 눈앞이 흐려질 듯 아찔해진다. 그렇게 한참이나 입술을 가만히 겹쳤다가 떼어내며) ...이렇게면 돼?
유스텐:응... 응... (한 번의 입맞춤이 오히려 감정의 기폭제가 되어버린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커다란 눈물방울도 함께 흘러내린다. 어깨의 들썩임이 잦아지더니 이내 어린 아이처럼 울기 시작한다.)
릭사엘:(엉엉 울어버리는 너를 다급히 끌어안고 귓가에 입맞추며 속삭이듯) 쉿, 쉿... 괜찮아, 그만 울어. 뚝. (네가 울어버리는 영문을 전혀 모르지만 네가 우는 모습을 보니 그저 마음이 아파와서, 네 몸을 다독이는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유스텐:(네 옷자락을 꼭 붙잡고 한참을 울다가) 더... 하고 싶어요. 욕심부리지 않을테니까... 한 번만...
릭사엘:(네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다정하게 쓸며 너를 보듬어주다가, 고개를 살며시 틀어 네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춘다. 그리고는 너를 달래려는 듯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간지럽히듯 빨아당기며, 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손을 얽어넣고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유스텐:(입술을 살짝 벌려 애틋하게 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는다. 다정한 손길과 입맞춤에 감정이 점차 진정되고, 어깨의 들썩임이 잦아든다.)
릭사엘:(가늘게 뜬 눈꺼풀 아래로 온통 젖어버리고 온통 달아오른 너를 달아오른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젖은 입술을 떼고 네 뺨을 감싸쥔다. 그리고는 애달프게 웃으며) ...사랑해. 네가 울지 않으면 좋겠어, 유스.
유스텐:(얼굴을 찌푸린 채 웃으며) 나도..., 사랑해요, 릭스.
릭사엘:(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감정 고백인데도, 위태롭기만 한 너를 보니 마냥 기뻐할 수가 없어서 네 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준다) ...내가 더 많이. 하늘만큼 땅만큼.
유스텐:(네 품이 따스해서 어리광부리듯 이마를 비비다가 울음을 쏟아내느라 지쳤는지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진다)
릭사엘:(잠드는 네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다음에 또 봐, 내 사랑. 나의 꼬마 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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