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도 죽는 해수병이라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고,
은은한 조명은 분위기를 한껏 로맨틱하게 감싸줍니다.
완벽해요. 정말 완벽합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더없이 특별한 날이니까, 완벽해야만 합니다.
오늘은 당신과 내가 평생 함께할 사랑을 약속했던 지 벌써 3년이 되는 날.
이 소중한 순간을 로맨틱하게 맞이하려고, 함께 레스토랑에 왔습니다.
우리가 결혼 생활을 한 지 3년, 짧지도 길지도 않은 특별한 시간이었죠.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어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니 마냥 행복할 줄로만 알았지만,
몰랐던 습관을 알게도 되고, 품었던 환상이 깨지는 날도 있었고,
가끔은 다투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괜찮아요.
서로의 옆자리가 너무나 익숙해졌으니까요.
혹시 당신에게 아직 모르는 부분이 남아있다면,
앞으로도 기꺼이 더 알아가고 싶으니까요.
시선이 마주치자, 릭사엘은 당신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접듯이 활짝 웃으며 와인잔을 가볍게 기울이네요.

자기 마음에 들어?


(손을 내밀어 네 손등을 보드랍게 움켜쥐며) 결혼 기념일 축하해, 내 사랑.



사실 아직도 종종 실감이 안 난다?
그냥...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설마 나중에 결혼한 지 10년이 됐을 때에도 실감 못하는 거 아니지?

... 사실 아닐 거라고 장담 못 하겠어.



내가 자기 설레게 하려고 이런저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좋으면 좋은 거지.



...어때? 너는 결혼한 게 실감이 나고 그래?


보통 5년이나 같이 산 커플들은 어떤지 모르겠네.

난 우리가 끼리끼리라서 좋은데.





넌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나봐.





내가 늘 옆에 있을 텐데 무슨 걱정이야.

미안해, 자기. 기념일에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것 같네.


우리가 3년 내내 신혼 분위기인 건 아마 자기 역할이 크다고 생각해.





그렇게 단란한 대화를 이어가던 그때
잔잔한 피아노 소리 사이로, 불청객처럼 핸드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이런 달콤한 분위기를 깨는 소리의 주인은 누굴까요.
당신이 잠시 주변을 살펴보면 릭사엘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벨소리 울리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합니다.
아, 릭사엘의 휴대폰이었군요.
릭사엘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립니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가 온 것을 보면 급한 연락인 걸까요.

급하기는 급한 모양인지
릭사엘은 당신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나섭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나중에 릭사엘이 돌아오면 물어보기로 하죠.
당신은 포크로 접시에 있는 것을 애꿎게 건드려봅니다.
데이트 중에 방해를 받다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평소에 오고 싶었던 레스토랑이나 조금 살펴봅시다.
당신과 릭사엘이 사는 집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입니다.
이곳에서 식사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사실 이번에 처음 와 본 곳입니다.
붉은 벨벳으로 만들어진 [커튼]이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휘감아 냅니다.
하얀 식탁보가 씌워진 [테이블]은 분위기를 한결 더 세련되게 하고,
레스토랑 한가운데엔 그랜드 [피아노] 가 놓여 있군요.
그 위에 있는 샹들리에는 정교한 유리 세공을 한 조각들이 가득해
빛을 살랑이듯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얀 식탁보가 씌워진 테이블 한가운데 유리 꽃병이 있습니다.
꽃병에는 장식용 잎과 [꽃] 하나가 꽂혀있네요.
그 외에는 당신과 릭사엘이 먹던 음식이 담긴 접시,
포크와 숟가락과 나이프, 냅킨이 있습니다.

당신이 슬쩍 살펴보면
이 꽃은, 안개꽃입니다.
하얀 꽃이 자잘자잘 붙어 있는 걸 보면 정말 안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안개꽃의 꽃말을 아나요?
언젠가 누가 말해줬던 것 같은데.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96 |
| 판정결과: | 실패 |
안개꽃의 꽃말은, 맑은 마음과 사랑의 순간..
그리고... 또 뭐가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습니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입니다.
그러고 보니... 레스토랑에 울려 퍼지던 피아노 소리가 멎었네요.
피아니스트도 잠시 쉬나 봅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5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사각, 사각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기분이 썩 좋은 소리 같지는 않습니다.

붉은 벨벳 커튼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래에는 황금색 테슬이,
커튼 자체에는 황금 문양이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화려함은 결코 과하지 않으면서도 수수하지 않아,
레스토랑의 품격 있는 분위기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지는 듯 합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67 |
| 판정결과: | 실패 |
릭사엘이 나갈 때 문을 닫지 않은 걸까요.
붉은 벨벳의 커튼이 살짝 흔들립니다.
이제 더 둘러볼 것도 없고...
곧 릭사엘이 돌아올 테니 접시를 깨작거리며 기다려보도록 하죠.
.
.
.
점점 주변의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웁니다.
그런데도 릭사엘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네요.
먼저 나가야 하는 걸까요.
금방 오겠다고 하더니 50분이 넘도록 오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점점 지루함을 넘어 초조함으로 변합니다.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면, 길고긴 한숨이 새어나옵니다.
어쩌면... 어디서 길을 잃은 걸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찾아보는 편이 좋겠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 머리가 울립니다.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 걸까요.
앞이 잠시 보이지 않고, 멍해집니다.
현기증 같은 증상에 머리를 붙잡고 있으면
멀리서 빠르게 뛰어오는 릭사엘이 보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나 하냐고
무어라 투덜거림이라도 뱉으려고 하면
훅, 콧속으로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끼칩니다.
무슨 냄새죠?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 향수 냄새.
분명 전화를 하고 온다고 하더니
전화 말고 다른 것이라도 한 것일까요.
릭사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
표정이 묘하게 어색합니다.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죠.


별일 아니라며 당신을 끌어안는 손이
어쩐지 평소보다 투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릭사엘의 얼굴은
분명하게 결백을 주장하고 있네요.
그렇죠... 단순히 향수 냄새가 난 것뿐입니다.
누군가 향수를 독하게 뿌린 사람이 릭사엘이 통화하는 동안
옆을 지나가서 옮은 거겠죠.
통화하는 시간이 이상하리만큼 길기는 했지만...
오늘은 결혼기념일 3주년이고, 좋은 일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쪽은 왜 이리 편하지 않을까요.
꼭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이건 마치, 폭풍전야 같습니다.




...집에 갈까? 사람들도 다 갔고 식사하기도 애매하고.

.
.
.
그 날 이후로 릭사엘은 점점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시간, 2시간... 그러다가 점점 당신이 잠이 들기 직전의 시간까지.
일이 바빠서 늦었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다고 하지만...
당신의 의심에 불을 붙여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또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귀찮을 정도로 연락을 했던 사람이
요즘 들어 연락이 제법 뜸합니다.
뭐해? 네 생각. 나도.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빨리 들어갈게.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시답지 않은 대화가 끊기지 않았던 메세지 창은
어디야? 밖이야. 오늘 늦어? 응 늦을 것 같아.
당신의 일방적인 물음만 가득합니다.
권태기라고 보기엔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입니다.
결혼 이후로 이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손가락을 움직여 메세지 창을 올리면, 속상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릭사엘이 보고 싶습니다.
항상 저를 먼저 찾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릭사엘이 말입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습니다.
오늘도 릭사엘은 늦는 걸까요?
릭사엘에게 전화를 걸어볼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릭사엘은 연락도 없고...
그냥 이렇게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밥이라도 먹고 오는 건지, 미리 알려주면 좋을 텐데요.
얼마나 바쁘기에 연락도 이렇게 없는 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릭사엘도 바빴던 일주일의 흔적이
집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할 것이 없으니 집 정리라도 해볼까요.
릭사엘이 함께 해주기엔 요즘 너무나도 바쁘니 말입니다.
릭사엘과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집입니다.
이 집에서 동고동락한 지 벌써 5년째로군요.
처음에 릭사엘의 손길에 이끌려 이 집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금방 이곳을 나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래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처음에는 속상한 일이 많아서 말다툼도 하고
릭사엘이 그럴 때마다 당신을 안아주며 기분을 풀어줬었는데...
그때가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당신이 외롭고 비참하도록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때였죠.
묵직하게 눌러내리는 눈꺼풀과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1층에는 [거실], [부엌], 테라스, 현관이 있습니다.
2층에는 당신도 잘 알다시피 당신과 릭사엘이 함께 사용하는 [부부침실]과
[당신의 방], [릭사엘의 방], [화장실]이 있고 말이죠.

따뜻한 갈색의 가죽 [소파]가 전반적으로 거실 분위기를 휘감는 것 같습니다.
그 앞에는 짙은 밤색의 원목 탁자 위 큰 크기의 [TV]가 있습니다.
거실 바닥에는 베이지색의 부드러운 원형 러그를 깔았습니다.
커다란 창문을 가리는 커튼은 색을 맞춰
하얀 커튼에 얇은 갈색 실로 일정한 문양이 그려진 것입니다.
거실 창 밑에는 작은 행운목이 있습니다.
릭사엘의 아버지의 책이 가득 꽂혀 있던 책장에는
어느 순간부터 당신들의 발자취를 기록하듯
베이킹 관련 책자, 요리 관련 책자, 서정적인 소설책,
결혼식과 신혼여행에서의 사진이 가득 든 앨범과
릭사엘이 대학교 전공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읽는
여러 서적들이 꽂혀 있습니다.

소파에 앉으면 부드러운 가죽이 당신의 몸을 받쳐줍니다.
쉬는 주말이면 이곳에 자주 않아 릭사엘과 영화를 즐겨보기도 했죠.
며칠 전까지 잔잔했던 그 평화가 그립습니다.
따스한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치고, TV에서는 자잘한 영화소리가 나고,
당신의 무릎에는 당신을 간지럽히는 릭사엘의 머리칼이 있었죠.
그렇게 위에서 릭사엘을 내려다보면, 그보다 사랑스러운 것이 없었는데...
텅 빈 무릎이 눈에 띕니다.
그때 당신의 눈에 소파 위에 놓인 [리모콘]이 걸립니다.
TV 옆에는 크고 작은 액자가 놓여있습니다.
많은 액자 중 신혼여행 가서 릭사엘이 찍어준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진에도 당신 혼자고, 지금도 당신 혼자인데...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당신이 리모콘을 들어 TV 전원을 무심코 틀면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6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목은 눈의 여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설레고 풋풋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릭사엘과 이렇게 설레던 때가 있었죠.
결혼을 하면 그 설렘이 사라지고 정으로 살게 된다고 누가 그랬는데...
요즘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설렘이 남아 있는지, 아직 가슴이 뛰는지.
릭사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밖으로만 나도는 릭사엘은.

리모콘 버튼을 툭툭 눌러 채널을 바꾸자
이번에는 법률 관련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람'...이요?
그러고보니 요즘 유난히 릭사엘이 집에 안 들어오지 않았나요.
일전에는 릭사엘이 휴대폰으로 액세서리를 고르고 있던 장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문자도 잘 보지 않고,
먼저 연락을 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고 있죠.

'그리고 릭스는 바보가 아니야. 자기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정도는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나중에... 언젠가 전부 설명해주겠지.'
(내용을 들을수록 마음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아 TV를 끄고 부엌으로 향한다) '혹시나 일이 많이 바빠서 밥을 못 먹었을 수도 있으니까 뭐라도 있나 볼까. 어차피 릭스는 밤늦게 뭘 먹는 성격은 아니지만...'
부엌으로 들어서면 어두운 색의 2인용 [식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쓴지 좀 된 [조리대]가 보입니다.

조리대에는 물기 하나 없습니다.
요즘 당신과 릭사엘 모두 바빠서 그랬겠죠.
아침은 물론이거니와 저녁도 함께하지 못했으니까요.
조리대는 덕분에 요리를 한 흔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이곳에 다 모인 것만 같네요.
배는 고프고, 릭사엘은 당신에게 연락이 없습니다.
역시... 오늘도 늦는 것이겠죠. 식사 준비를 할까요?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와 2층으로 올라가 늘 그랬듯 부부침실로 가려다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이었던 곳으로 향한다)
창밖의 깜깜한 전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수놓인 듯 듬성듬성 빛을 밝힌 건물들을 바라보니,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조용하고, 적적합니다.
릭사엘과 결혼한 이래로 이랬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니, 결혼뿐 아니라 릭사엘을 만나고 나서 이랬던 적도 없었었죠...
바쁜 일상 틈에 존재하는 적막을 릭사엘이 항상 채워줬었으니까요.
방에는 [거울]과 [책상]이 있습니다.

책상은 밝은 색의 원목 책상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쓴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전까지 릭사엘이 당신을 위한다고 가구점에서 가장 예쁜 것으로 사와
선물해 주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책상 위에는
보얀 먼지만 앉아 있지만 말입니다.

거울은 전신 거울입니다.
당신이 이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릭사엘이 장만해준 것이죠.
항상 나가기 전에 이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했습니다.
릭사엘과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부터는
릭사엘이 직접 매무새를 가다듬어줘서
쓸 일은 거의 없어졌었지만 말입니다.

릭사엘의 방에 들어간지도 꽤 되었습니다.
방 문을 보면 꼭꼭 닫혀 있네요.
전에는 열어 놓았는데 말이죠.
문을 닫고 있어도 된다고 이야기를 해도
릭사엘은 항상 문을 열어두곤 했습니다.
벽을 만드는 것 같아 싫다고 했었나요.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을 떠올리면
정작 지금은 그가 벽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당신이 릭사엘의 방에 들어가려고 문고리에 손을 올리면...
문고리를 다 돌리지 않았는데도 찰칵찰칵 소리가 들립니다.
아무래도... 닫혀 있는 것 같습니다.
허탈하네요.

'하아... 여기서 이러고 있어봤자 뭐해. 당사자도 없는데. 정말로 릭스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질질 끄는 방식을 쓰진 않았을 거야.' (그저 자신이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중일 거라 생각하고 부부 침실로 향한다) '좀... 자야겠어.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
부부침실에는 커다란 킹사이즈의 [침대]가 있습니다.
침대 옆에는 작은 탁자와 [서랍]이 있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드레스룸]이 있습니다.
암막 커튼을 달아놓아서 그런 건지... 방 안이 깜깜하네요.
둘이 같이 있을 땐, 안방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는데 고적합니다.

드레스 룸 앞에는 전신 거울이 있습니다.
거울이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보면,
평소보다 짙은 다크써클이 눈에 띕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일찍 자야겠네요.
릭사엘이 늦게 들어와 들어오는 걸 기다리다보니
너무 늦게 잔 탓인 것 같습니다.
문으로 닫혀 있는 드레스룸을 열면,
행거에 걸린 당신의 옷과 릭사엘의 옷이 보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옷이 모두 들어 있네요.
그중에 제일 눈에 띄는 건 당신과 릭사엘이 결혼식에서 입었던
웨딩 수트입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릭사엘의 옷가지에 시선을 주며 수트를 매만지면
결혼식 당일이 떠오릅니다.
밝고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행복 가득한 결혼 생활의 출발로 들렸었는데...
계속 혼자 있으니 불쾌한 상념이 밀고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옷이라도 옷걸이에 걸고 나가서
침대에 조금이라도 누워야겠어요.
아직 릭사엘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바닥에 떨어진 릭사엘의 옷을 줍고
릭사엘의 옷을 옷걸이에 걸려고 살피다 보면...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24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옷에 붙은 머리카락이 눈에 띕니다.
머리카락을 들어 살피면... 푸른색의 머리카락입니다.
릭사엘의 머리카락인 걸까요.
원래도 이렇게 옷에 잘 붙어 있었나 싶습니다.
당신은 묘한 의문을 갖고 머리카락을 떼어 바닥에 버립니다.

서랍 위에는 서너 개의 [액자]와 [수면등]이 올려져 있습니다.
서랍은 [윗칸], [아랫칸]으로 이루어져 있네요.
당신이 손을 뻗어 무심코 서랍 윗칸을 열어보면
안에는 연애 당시에 썼던 [편지]와 포토 부스에서 찍었던 즉석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편지는 다 해서 서너 개 정도 있습니다.
열어서 내용을 살피면 단정하고 정갈한 필기체가 보입니다.
릭사엘의 필체입니다.
첫 번째 편지는... 연애하고 싸운 날이었나 봅니다.
릭사엘이 미안하다는 말을 한가득 써뒀네요.
구구절절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진심을 다해 써뒀습니다.
그러고보니 에전에 이 편지를 보고 화가 풀렸던 것이 생각나네요.
두 번째 편지는 아, 당신의 생일이었나요.
편지지부터 생일을 축하하는 듯 케이크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하지 않았을까.
내 운명은 늘 줄곧 너 하나였을 테니까.
생일 축하하고 좋은 하루 보내. 사랑해.
-5월 25일, 너를 사랑하는 릭사엘이.
...어쩐지 릭사엘의 사랑한다는 말이
아주 오랜만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 '그저 잠깐 바쁜 거겠지. 내가 예전에 본 공작님도 좋으신 분 같았고, 그 분 이름을 써가면서까지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니까. 내일은 릭스가 했던 일들을 내가 대신 해야겠어. 그럼 나중에 릭스가 보고 도움이 되었다고 좋아할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 내일 할 일을 다짐하고 아랫칸을 열어본다)
서랍 아래 칸에는, 결혼 전에 쓴 [각서]와... [상자] 하나가 보입니다.
각서를 보니 떠오릅니다.
맞아요, 당신은 릭사엘과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도
결혼하고 한참 뒤 서로가 익숙해지거나 사랑이 식으면 어쩌지 하고
그때도 두려워했었더랬죠.
릭사엘은 그런 당신을 부드럽게 안아주며
그럼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꼭 지켜야 하는 사항들을 각서로 남기자고 했었습니다.

각서를 읽어보면...
이런 내용을 적었었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당신이 말하자
릭사엘이 싱긋 웃으며 빨리 결혼이나 해달라고 졸랐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걸 본 당신이 이제서야 기억나는 걸 보면...
릭사엘은... 까맣게 잊었으려나요.

이 상자는...뭐지? (상자를 열어본다)
상자를 살펴보면, 액세서리가 들어있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상자입니다.
상자의 덮개를 열어보면, 당신이 생각이 맞습니다.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손가락 크기와 전혀 다른 사이즈의 반지 하나와,
릭사엘의 손가락 크기와 같은 사이즈의 반지 하나.
반지 디자인이 화려한 걸 보아...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왜, 하필... 지금이죠?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청소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티를 내는 것일까요.
심란해집니다.

(울컥 토해져나오려는 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반지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릭스... 릭사엘... 이건 대체...
'혹시 내가 환각을 보는 건가? 의심을 해서 벌을 받고 있는 건가? 내가... 그동안 뭔가 잘못한 게 있었나? 그치만 릭스는 정말 괜찮아보였는데.'
잠이... 잠을 자야... (눈을 질끈 감으며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참아낸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잠을 못 자겠어...
(비척비척 일어나 부엌으로 다시 향하며) '술이라도 마시면 기절하든 잡념이 사라지든 하겠지...'
당신이 비틀비틀 간신히 걸으며 계단을 내려가면
현관문에서 달칵 소리가 들려옵니다.
릭사엘이겠죠, 릭사엘 밖에 없겠죠.
이 늦은 시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대체 무엇을 하다 온 것인지 두려워집니다.
그래도... 설마 릭사엘이.
당신을 그렇게나 사랑하던 릭사엘이.
그런 일을 벌인다는 게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이던가요.
당신이 어떻게든 해명을 바라며 가까이 다가서면,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끼칩니다.
이 향은, 저번에 레스토랑에서 맡았던 향입니다.
심지어 저번보다 더 진한 것 같습니다.
릭사엘은 이런 향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계열의 향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 향의 주인은 대체 누구인 거죠?
불쾌한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와 벌레처럼 등줄기를 훑습니다.
당신이 아무 말 없이 릭사엘을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 당황한 릭사엘이 입을 뗍니다.

그래요, 늦은 걸 알고 있군요.
그 모습에 더 기가 찹니다.
정말 별것도 아니지만, 사과를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먼저 연락을 못해 미안하다든가,
문자를 늦게 봐서 답장할 수 없었다든가.
당신이 늘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눈치를 대체 어디에 팔아먹고 왔길래.
굳어진 얼굴로 릭사엘을 보면
릭사엘은 한숨을 쉬며 당신을 달랩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68 |
| 판정결과: | 실패 |
이제 됐지? 라는 말이 귓전에 울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 그가 당신을 귀찮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집니다.
오늘 집안을 둘러보며 릭사엘과 있었던 추억들을 보아서 그러는 것일까요.
릭사엘과 릭사엘이 비교됩니다.
연애를 할 때와 지금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 보입니다.
조금 멍하게 보았을까요, 릭사엘은 겉옷을 벗으며 계단쪽으로 마저 향합니다.

릭사엘은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고 음성을 흘립니다.
그 음성이 차갑게 거실에 나뒹구는 것 같습니다.
내일은... 주말인데. 또 어딜 가겠다는 걸까요.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61 |
| 판정결과: | 실패 |
부부 침실로 들어가는 릭사엘의 목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보입니다.
내일... 설마... 불쾌한 향수를 뿌리는
저 붉은 것의 주인을 만나러 가는 것일까요.
쾅, 조금 크게 닫히는 침실 문 소리에 놀란 가슴이 허덕입니다.
.
.
.
…아침, 인가요. 눈을 떴으니 아침이겠죠.
암막 커튼 때문에 안방이 깜깜해서
아침인지, 아니면 낮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제저녁 일찍 잔다고 하고 뜬 눈으로 새벽을 지새우다가
겨우 잠자리에 들었죠.
무엇 때문이었나요?
분명, 릭사엘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두운 방에 들어오는 그의 얼굴의 굴곡이,
당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대 한 쪽을 차지한 그 몸이.
당신으로 하여금 밤을 지새우게 했죠.
커튼 사이로 어스름히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옆을 바라보면,
릭사엘이 곁에 없습니다.
화장실 쪽에서 쏴아아- 옅게 닿는 물소리가 들립니다.
그러고보니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죠.
전에는 묻지 않아도 무슨 약속인지 말해줬는데...
오늘은 주말입니다.
원래라면 릭사엘과 느즈막히 일어나 같이 아침을 먹고
거실에서 뒹굴거리다가 장을 보러 나갔을 주말.
항상 함께 시간을 보내던 릭사엘이 밖을 나간다고 하니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오는 기분이 듭니다.

... '그리고 난... 이제 릭스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걸. 그런 건 전혀 생각해본 적 없단 말야.'
(화장실로 다가가 노크하고는) 릭스, 자기야. ...우리 잠깐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혹시나 저를 귀찮아할까 싶어서) ...귀찮게 하려는 거 아니야. 그냥, 5분만이라도 시간 좀 내줘.
당신이 잠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안쪽에서 샤워기 소리가 멎고
릭사엘이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무표정한 얼굴로 슬쩍 나옵니다.


그러니까 고작 얼마 안 되는 기간으로 괜한 생각을 하기 싫어.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 서랍에 있는 상자는 대체 뭐야? 요즘 나한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 '울면 안 돼. 울면... 안되는데...'




이젠 나한테 설명하기도 귀찮은 거야?

자기 나 의심하는 거야, 지금?


(한숨을 푹 쉬며) 그래. 어떤 설명이 필요해?

결혼기념일 이후로 갑자기 그러잖아.
나도 이상한 의심같은 거 하기 싫어. 그저 잠깐 바쁜 기간이겠거니- 하고 얌전히 있었어.
그래도... 설명은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 거지같은 향수 냄새도, 매일 이런 저런 일로 늦는 것도, 이젠 그 늦는다는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내가 그렇게 대단히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야?
(매달리듯 네 어깨를 감싸쥐며) 릭스, ...자기야.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알잖아. 그냥... 뭐든 좋으니까 한 마디라도 해주면 안 돼?
당신이 그렇게 릭사엘의 어깨를 감싸쥐고 울분에 젖어 시선을 살짝 내리면,
여전히, 목가에 붉은 것이 보입니다.
갓 새겨진 것처럼 새빨갛고 붉습니다.





하아... 됐다. 나 이제 나가야 해. 약속에 늦겠어.



왜 넌 내가 이상하다는 것처럼... 아니다, 그냥, ... 가.





이것만 믿어.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다 너를 위해서였다는 거.
(미련 없이 네 몸에서 손을 떼며) 나가볼게. 아침 먹고 쉬어.
릭사엘은 그렇게 말하더니 당신의 옆을 스쳐지나가
침실로 들어가버립니다.

당신이 이미 사라져버린 릭사엘의 뒷모습을 더듬으며
멍하니 복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품에서 무언가 진동이 울립니다.
품을 뒤적거려보면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와 있습니다.

알렉스입니다.
이 문자 내용에 그렇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요.













'솔직히 집에 박혀있기보다 오늘은 나가고 싶기도 했고...'





당신이 알렉스와 대화를 마치고 휴대폰 화면을 끄면
타이밍이 절묘하게 한껏 꾸민 릭사엘이 안에서 나옵니다.
원래 이렇게 꾸미는 사람이었나요?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라도 만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코 끝에는 인위적인 향이 맴돕니다.
아무래도 향수를 뿌렸나 봅니다.

릭사엘은 무어라 더 할말이 있는 듯 싶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계단을 탁탁 내려갑니다.
황급한 발걸음 뒤로 당신이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이 나뒹굽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요.
머리를 굴려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외출 준비나 할까요.
릭사엘이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든 말든
나간다고 별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오늘은 평소처럼 혼자도 아닐 테고요.
.
.
.
준비를 다 마치고 밖으로 나와 역 근처 카페에 도착해
유리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부가 굉장히 넓습니다.
알렉스가 먼저 도착해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워 보이네요.
카페 안에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장식들이 눈에 띕니다.
화려하지도, 무난하지도 않아 카페 분위기가 잔잔합니다.
...릭사엘이 좋아할만한 분위기네요.
당신이 주변을 살피고 있으면 알렉스가 먼저 당신을 발견하고는
작게 손을 흔들며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바빠?


어쩐지 너랑 릭사엘이랑 카페에 따로 들어온다 했다.
따로 들어오다뇨?
알렉스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면
구석에 있는 두 개의 인영이 눈에 들어옵니다.
풍성하게 굽이치는 짙은 남색 머리칼, 아침에 보았던 베이지 코트,
당신이 백화점에 함께 가서 골라줬던 니트.
안쪽에 않은 저 사람은... 릭사엘이 분명합니다.
릭사엘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요. 약속이 이 카페였던 걸까요.
그의 반대편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떨리는 눈동자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릭사엘과 그 여자가 즐겁게 웃으며 대화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뭐가 그리 재미있길래...


그냥 전부 다 나를 위해서라고만 말해준 게 다야.


당신이 그렇게 릭사엘을 변명하고 있으면
먼 테이블 너머로 릭사엘과 모르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넘어옵니다.
애써 부인하려고 노력하지만 손끝이 흠칫 떨립니다.



뭐, 설마 릭사엘이 바람을 피우거나 그러는 경우는 없겠지만.

...그리고 릭사엘이 그럴 거란 가능성도 생각해본 적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서 잠자코 설명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뭐, 걱정할 거 없으면 슬슬 뭐라도 시킬까. 내가 사주기로 했잖아.

... 너 혹시 귀 밝냐?



당신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알렉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알렉스는 스치듯 릭사엘과 모르는 여자가 앉은 테이블을 지나가면서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가 이윽고 카운터로 향합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이 동동 띄워진
새콤한 레몬에이드를 들고 자리로 돌아옵니다.



어, 라. 방금 뭐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잠시 현기증이 났던 모양입니다.
요즘 들어 잠을 거의 못 잤으니 그럴 법도 하죠.
겨우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앞을 보면
알렉스는 부산스럽게 품에서 휴대폰을 뒤집니다.
큰 벨소리가 울리고 있네요.
알렉스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순식간에 얼굴을 구깁니다.

아, 응응... 나 지금 친구랑 놀고 있는데 무슨 일이냐?
...지금? 아씨... 왜 하필 지금...
알았어, 바로 갈 테니까 수습 좀 하고 있어.
낮게 가라앉은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빠르게 전화를 끊고 당신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눈빛에
미안함이 가득 서려 있습니다.

미안하다, 나 먼저 가볼게. 나중에 밥 사줄게.


다른 것도 아니고 도난 사건에 연루가 되었다는데 어쩌겠습니까.
평일에도 주말에도 바쁘기만 한 친구를 보내줘야지요.
그렇게 알렉스를 보내고 나면, 혹시 릭사엘도 알렉스처럼
곤란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방울이 반짝이며 맺히는 유리컵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릭사엘이 있는 곳으로 시선이 향합니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곤란한 일을 겪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웃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꼭 저렇게 붙어 있어야 하나요?
손을 잡을 필요가 있나요.
아무리 고운 눈으로 바라보려고 해도, 쉽사리 그리 되지 않습니다.
마치 눈에 무언가 들어간 것 마냥.
갑자기 깨진 약속에 하루는 붕 떠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뭘 할까요.
집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이곳에서 릭사엘을 보고 있을까요.

(옛적에 고쳐진 줄로만 알았던 버릇으로 손톱 옆 살을 다시 뜯으며 초조하게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본다)
당신은 이곳에 조금 더 남기로 했습니다.
릭사엘을 의심하는 것은...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이미 릭사엘이 수상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당신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는데,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시선이 비스듬히도 겹치지 않은 채 엇갈립니다.
물론 당신이 이곳에 있는지 모르는 릭사엘이지만...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걸 알아도 그는 당신을 바라볼까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당신만을 바라볼까요?
마신 것은 레몬에이드인데, 입에서 쓴 맛이 납니다.
당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릭사엘은 멀리서 여자를 보며 활짝 웃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당신 앞에서는 저렇게 웃어주지도 않았으면서...
릭사엘의 웃음이 원망스럽게 느껴집니다.
아닐 거라고,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데도
릭사엘의 방향 어긋난 웃음 한 번 한 번을 볼 때마다
휴지 조각 찢기듯 가슴에 너덜거리는 통증이 남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으면
곧 음료를 정리한 릭사엘과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당신은 그들을 따라가려고 반사적으로 일어나다가 양심에 찔려 다시 앉고,
다시 몸을 일으킵니다.
따라가지 않는다면, 여기에 남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당신은 다른 언어로 애써 부정하려고 하지만,
당신은... 어쨌든 릭사엘을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남은 게 아니던가요.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놓칠 것이 분명합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컵들을 정리하고 빠르게 밖으로 나서면
저 멀리 두 사람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당신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뒤따라 걷습니다.
끊임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저리도 오래 나누나요.
계속해서 오가는 웃음 소리를 들으면
일단은 공적인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멍하게 이명이 들리고, 시야가 어지러워요.
햇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뜨겁습니다.
분명,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서 그런 것이 분명합니다.
건물의 벽을 짚어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어봅시다.
눈을 감고 숨을 쉬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 들 테니까요.
당신이 애써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릭사엘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인 것마냥 몸을 겹치고 있습니다.
여자가 릭사엘의 품속에 안겨 있습니다.
릭사엘... 릭사엘의 표정은 어떻지?
황망한 눈이 정면을 뚫어져라 내다봅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4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저 표정은... 당신에게만 지어주던
그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이 아닌가요.
사랑스럽다는 그 웃음 아닌가요.

당신이 벌어진 현실을 믿지 못하고 굳어 있으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들어갑니다.
골목길로 들어간 것 같은데...
두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잊고
숨을 헐떡이며 당신이 그 골목으로 들어서면,
온통 화려한 전광판에 핑크빛으로 쓰여 있는...
읽고 싶지 않은 영어가 가득 적혀 있는 거리로 이어집니다.
릭사엘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면,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이 많은 건물 중에 하나로 들어간 걸까요.
거리에는 당신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도 거리에 있지 않습니다.
휑한 거리의 고요함이 유난히 시리게 당신의 품을 파고듭니다.
.
.
.
터벅터벅, 걸음을 옮깁니다.
보다 무거워진 발걸음 입니다. 주변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 되었나봅니다.
푸른 하늘이 까맣게 물들고 가로등에 하나 둘, 불이 켜집니다.
가로등 아래 당신의 그림자 하나가 짧게 드리웁니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곳도 이곳과 다름 없으니까요.
아니, 어쩌면 이 길거리가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의 모습이 일절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괜한 추억팔이도 하지 않으니까요.
생각 없이 걷다 보면, 큰 공원이 보입니다.
세게 부는 바람에 아슬하게 붙어 있는 낙엽이 볼품 없이 후드득 떨어집니다.
주변에 앉을 곳이 있을까요? 잠시 앉아 있다가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잠시 살펴보면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벤치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잠시 쉬어요, 유스텐.

한참이나 소리를 죽이고 삼키지 못한 눈물을 쏟아내다 보면
귓가를 간지럽히듯이 닿는 도시의 소음이 점점 잦아듭니다.
하늘은 더 까맣게, 누군가 눈을 가린 것처럼
장막 같은 밤이 찾아옵니다.
한참이나 눈물을 흘린 눈이 뻑뻑하게 울음을 멈추고
대신 단전 깊은 곳에서 무거운 한숨을 뱉어냅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존재를 뱉어냈음에도
체중은 한 톨도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여기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나뒹구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요 유스텐.
돌아가야겠죠, 너무 늦었으니까.
아니... 당신이 돌아갈 곳이 집... 집은 맞나요.
당신에게 오롯이 허락되었던 공간이 맞나요.
하지만 당신의 발걸음은 달리 닿을 곳이 없습니다.
여전히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옮깁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갑니다.
익숙한 길에 다다르면, 낮에 보았던 인영이 눈에 아프게 박힙니다.
집으로 이어지는 어둑한 길목, 가로등도 빛이 어긋나는 그곳에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당신의 릭사엘이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팔을 뻗고,
그 사람의 등에 그 손을 두고 가깝게 당깁니다.
한 치의 틈도 허락하기 싫다는 것처럼 하나의 몸으로 엉겨듭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들립니다.
물기가 어린 소리가, 숨을 헐떡이듯 붙여내는 소리가.
작게 응어리지듯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가 당신의 귀에 박혀듭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90 |
| 판정결과: | 실패 |
멍해집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걸 보고... 무슨 반응을 해야 하는 걸까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게 됩니다.
무슨 상황이든, 어떤 사연이 있었든,
이런 장면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11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아직도 부정하고 있나요, 유스텐.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릭사엘에게 확인사살을 당했다는 걸.
머릿속의 어딘가, 심장속의 어딘가가
좀 먹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의미인 걸까요.
아... 불쌍한 유스텐.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릭사엘은
이제 세상에 더는 없어요.
당신은 급히 골목을 돌아 가까운 건물에 손을 짚고
진창으로 처박히는 몸뚱이를 벽에 기댑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요.
당신이 지치고 힘들 때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머릿속에는 계속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숨을 나누는 릭사엘.
그 전부터 연락이 뜸하던 릭사엘. 쌀쌀맞게 굴던 릭사엘.
불쾌한 향을 아무렇지 않게 묻히고 오는 릭사엘.
릭사엘, 릭사엘... 그 사이에서 당신을 보고 환하게 웃던 릭사엘이 불쑥 나옵니다.
그 모습에 눈앞이 흐려집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릭사엘이라도 사랑할 수 있나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웃고, 다른 사람에게 입 맞추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해도...
그를 사랑할 수 있나요?
지금 이 상황을 모른 척하고, 당신이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이 드나요?
그것이 진정, 당신이 행복을 유지하는 길인가요?
당신은 사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미 깨진 사랑을 다시 붙여도,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이미 깨진 사랑을 주워 담는 것에서도.. 손이 저릿하게 다칠 것을.
차라리, 먼저 말을 하는 것이.. 먼저 놓는 것이 덜 아프리란 사실을.
.
.
.
당신은 한참이나 주변을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면, 거실에
보조등만 켜고 소파에 앉아 있는 릭사엘이 보입니다.

종일 밖에 있어서 그런 걸까요, 또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릭사엘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순간 중심을 잃고 흔들리던 차, 릭사엘이 당신을 붙잡습니다.

릭사엘은 당신을 붙잡습니다.
당신의 눈을 보면 나는 또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데...
순간 릭사엘의 눈에 담긴 다른 이가 떠오릅니다.
순간 역겨움이 치고 올라옵니다.


잠시 소파에 앉아 있어. 얼음 가져다 줄 테니까.




진정해. (너를 그저 품 안에 억지로 안아들고 거실로 데려가려 한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11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힘껏 몸부림치며) 또..., 또 아무것도 설명하려 하지 않잖아, 넌! 대체 뭐가 나를 위한 건데? 뭐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이유라서, 흑... 그렇게 연인사이인 것처럼 둘이 그렇게 붙어있던 거야?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 너랑 그 여자가 모텔 거리로 들어가는 걸 봤어.



너도 운 것 같으니까 물 마셔야 해. 기다려.

난 쉬기 싫어. 지금 당장 알아야겠어.
... 너 지금 제대로 된 부정도 안 하고 있는 거 알아?


잘 알았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늘.
3주 내내 나를 바보로 만든 건 너잖아.
그럼 넌 반대로 내가 너처럼 행동한다고 하면... 너처럼 "전부 다 너를 위해서다." , "말할 수 없다." 라고만 대답하면... 잠자코 기다릴 수 있어? (비뚜름하게 웃으며) 나와 다른 누군가가, 연인처럼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누고 웃음을 주고받는 것들을... 너는 그저 "나를 위한 거랬으니까." 라고 생각하고 잠자코 있을 수 있냐고.
나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할 작정이야, 릭스. 우리 그런 건 고등학교 때 졸업하기로 마음 먹었잖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중에 진짜로 네가 말하는 그 "때"가 되어서 전부 다 설명을 들으면? 네가 다른 사람이랑 붙어있었던 사실이 아닌 게 돼?


지금 네 대답 굉장히 비겁한 거 알지.


그냥... 나를 위해 전부 다 그만두면 안 돼?
(눈물을 매단 채 애써 웃으며) 나... 아직은 괜찮아. 네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지 정도는, ...아니,까... 흑...윽... (손등으로 계속해서 차오르는 눈물을 눈가가 쓸릴 때까지 연신 닦는다) 제발... 이제 그만해줘. 나... 나 너 없이는 어떻게 살지 같은 건 전혀 계획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럼
내가 죽으면 너는 그만둘래? 그런 거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






지금도 끊임없이 네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뭐를 어디까지 했는지 자꾸만 상상하게 돼.

그만 상상해.

전부 다 설명하란 말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거야.
그것도 말할 수 없어?


너 나를 정말 사랑해?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 넌 나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야, 릭스.
네 행동들은 전부 다 나를 위한 거라면서, 내가 속상해하면 그건 전부 내가 나쁜 사람인 것마냥 말하잖아.
지금 관두면... 내가 전부 다 잊어버리겠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잖아.
뭐가 "나를 위해서"고 뭐가 "목숨을 걸 정도"의 일인 건데?
나는 언제까지 너만 믿고 다른 사람이 너랑 부비는 걸 참고 기다려야 해?





진짜로.
정말로.
내가 말을 하고 싶어도.

잠깐... 우리 시간을 좀 가질까.
지금은 네 얼굴 보기가 너무 괴로워.
계속...계속 밖에서 봤던 것들이 떠올라.
모텔 거리에서 사라졌던 것까지도 그저 내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너랑 그 사람이 웃고 있던 것도, 껴안고 있던 것도 전부 다 내가 잘못 본 거야?

네가 알던 나는, 그런 걸 할 사람이야?

그럼 너랑 똑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
(아까까지 한껏 뿌리쳤던 너를 힘없이, 남은 힘을 전부 끌어내 안고 괴롭게 웅얼거린다) 전부 다 짜증나. 밉고 싫어... 너도, 나도.
나도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닌 걸 모르지 않는단 말이야... 그치만, ...
물어보면 뭐든 모른다고 대답하는 너도 밉고, 이 모든 걸 끝내는 제일 쉬운 방법이 있는 걸 아는데도 그 말조차 내뱉기 싫은 나 자신도 답답하고 짜증나.
...릭스,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난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
죽고 싶다는 건 거짓말이야. 죽느니 마느니 하는 것 전부 다.
너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겁이 많은 사람이 됐어, 릭스.
너를 놓기에는 난 무서운 게 너무너무 많아서... 죽는 것도 네가 생각나서 싫고, 갈라서는 것도 네가 생각나고, 너 없이 살아가는 건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무서워.
... 만약, 정말로 날 위한 거고, 동시에 네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그냥 나를 포기해줄래?





나도 비참한 상황이라는 걸, 넌 이해할 생각이 없구나.


몰라도 문제고, 알아도 문제야.


하아... (눈물과 한숨이 섞인 음성으로) 결국 너랑 난 생각하는 게 달랐다는 거네.

그럼 그냥 나를 미워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여기까지 하자.

하...
'거짓말쟁이.' 그래...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자.







아니지, 생각해 본 적이나 있어?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게 뭔지, 생각하려고는 해봤어?
넌 이렇게 결국 날 버리는구나.


하지만 그런대도 무슨 소용이 있지?
...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부엌에 다가오더니 얼음팩을 네 손에 쥐여주며) 찜질해. 난 나갈 테니까.
나도 오늘은 네 얼굴 못 보겠다.


릭사엘은 겉옷을 챙겨 밖을 향합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붙잡을 시간도 없이.
온몸에 힘이 풀립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해도 당신은 거실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고 맙니다.
미친 듯이 아프다고 하는 심장을 쉬이 달래려 하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릅니다.
집에는 당신이 우는 소리만이 퍼집니다.
구슬프고, 애통한 소리가.
당신의 울음 소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둠에 잠식됩니다.
먹먹해질 만큼 안으로 먹혀듭니다.
지독한 하루입니다.
아, 너무 아픕니다.
머리가 띵하고, 숨쉬기가 버겁습니다.
강렬한 햇빛에 몸이 말라가는 것 같습니다.
새벽에 무슨 정신으로 침실까지 올라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손끝부터 전해오는 고통에 겨우 눈을 뜨자
암막 커튼이 이미 걷혀 있습니다.
눈은 무언가 찔린 듯 아립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으면,
텅 빈 옆자리가 보입니다.
뭘 새삼스럽게, 익숙해진지 오래면서...
어제 일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멍해집니다.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이 모두 거짓말 같아요.
하지만, 전부 사실입니다.
당신이 떠올리는 모든 기억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답답하고, 무언가 가슴속에 뭉쳐있는 것 같습니다.
릭사엘은 정말로... 이혼을 준비하려고 할까요.
한참이나 운 탓에 눈물이 이제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휴대폰을 들어 멍하게 '이혼'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많은 정보가 나옵니다.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누르면... 이혼에 필요한 서류부터 뜨는군요.
협의 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 1통.
부부 각자의 가족 관계 증명서와 혼인 관계 증명서 1통.
주민 등록 등본 1통.
총 6장의 서류만 있으면, 남이 됩니다.
고작 그 여섯 장이면,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가족으로 지낸 정도 사랑도 끝난다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고달파집니다.

'릭스가 없으면 이제 난 어쩌지? ... 같이 살아온 세월보다 혼자 산 세월이 더 긴데 이런 고민이나 하다니 웃기네...'
... '여긴 원래부터 릭스의 집이었으니까 미리 짐을 싸두는 게 좋겠지.' (비척비척 일어나 복도로 향한다)
복도로 비척비척 나가보면, 고등학교 연인 시절
당신과 릭사엘이 방을 마주 보고 지낸 문이 놓여 있습니다.
불현듯, 릭사엘의 방 문에 시선이 스칩니다.
이 집을 떠나게 된다면... 다시는 저 방 안을 보지 못하겠죠.
릭사엘과 처음 손을 잡았던 곳, 처음 피부를 내보였던 곳.
어쩐지 그때의 공기가 떠오르며 그리운 감정이 물씬 밀려듭니다.

당신이 머뭇머뭇 문고리를 잡아 끝까지 돌리면
문고리는 부드럽게 달칵 소리를 내며
내부를 내보입니다.
릭사엘이 그 동안 이 문에 손을 댄 흔적은
전혀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전에 문이 잠겨 있다고 생각한 건
착각... 이었을까요.
커다란 문을 열어내고 방에 들어서면
익숙하고 서글퍼지는 향이 폐부를 가득 채웁니다.
릭사엘의 몸에서 항상 풍기는 시원한 허브 향기.
그 향기가 주인을 한동안 맞이하지 않은 방에도 빼곡히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 이 향을 맡으면... 당신은 누구를 떠올려야 할까요.
방 안에는 어두운 색의 원목으로 된 [책상]과
그 옆을 둘러싼 [책장]이 보입니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는 [프린터]가 놓여 있네요.

넓은 책상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된 서류가 가득입니다.
한 쪽 구석에는 데스크탑과 키보드가 놓여 있습니다.
릭사엘이 이곳에서 종종 책을 넘겨보던 모습이
눈에 밟히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 주변에는 [노트]와 [낙서]들이 보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네요.
비슷한 것들이 많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아,
무언가를 아주 오래 고민하고... 힘들어 한 흔적 같습니다.

'일단 낙서부터...'
낙서에는 기괴하게 생긴 벌레가 그려져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벌레의 모습입니다.
가만히 더 들여다보면... 핑, 머리가 돕니다.
어지러운 것을 붙잡고 다시 종이를 보면,
그려져 있던 벌레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분명히 봤는데, 사라졌습니다.
마치 누군가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아요.

(마저 노트를 살펴본다)
흔한 갈색의 스프링 노트입니다.
릭사엘은 종종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직접 종이에 쓰는 버릇이 있었죠.
노트는 펼쳐져 있어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3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물에 젖어서 흐릿한 글씨지만 어느 정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 적 없는 것을 ..보.. .., 들리지.... 것을 듣고, 나지 않는 ... 맡는다.]

(고개를 숙여 책상 아래 프린터를 살펴본다)
책상 아래로 허리를 숙여내면, 프린터기가 있습니다.
이혼 관련 서류는... 이것으로 출력하면 되겠네요.
프린터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코드를 뽑아놓은 듯 작동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몸을 낮춰 살펴보면,
콘센트 주변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입니다.
유리 조각입니다.
아무런 규칙 없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생겼네요.
거울이라도 실수로 깬 것일까요?
거울에 비친 빛이 눈으로 들어와 아파옵니다.

(도망치듯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다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3단으로 되어 있는 원목 책장입니다.
당신이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릭사엘의 방에 있던 것입니다.
책장 안쪽에는 릭사엘의 전공책과 여러 서적들이 꽂혀 있습니다.
크고 작은 책 표지 사이들 중, 파란색 표지의 책이 눈에 띕니다.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눈의 여왕'이라 적혀 있는 책입니다.
이건.. 꽤나 어렸을 적에 봤던 책인데,
최근에 본 것인지 제대로 꽂혀 있지 않습니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책을 제자리에 제대로 꽂아넣는다) 내 방에서 짐이나 정리하자...
그때였을까요. 아래층에서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들립니다.
예상하기로는... 집 현관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군요.
경첩이 열리는 소리는 전혀 나지 않고,
몇 번이고 수없이 열쇠구멍에 열쇠를 맞추고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납니다.
당신이 이상함을 느끼고 현관 쪽으로 나가면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릭사엘이 보입니다.
어제, 그렇게 나가고 나서 이렇게 금방 들어올 줄 몰랐는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더 이상 당신이 신경쓸 바가 아니지만요.
앞으로도, 이래야 할 겁니다.
릭사엘이 집 밖을 방황하든, 밖에서 누구를 만나든...
얼마 안 가면 남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먹먹한 눈으로 릭사엘을 바라보면
릭사엘은 걸음을 복도에 자꾸만 헛디디며 집 안으로 들어섭니다.
가만 보니 얼굴이 붉습니다.
품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기네요.
그렇게 당신이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집에 기어들어오던 릭사엘이
곧 당신의 얼굴을 보자 애절하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당신의 발을 붙잡습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가지 말라는 말과 당신의 이름만
반복해서 부릅니다.
그의 목소리 곁에 서 있다 보면,
곧 당신이 도망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따뜻한 손이 당신의 손을 감쌉니다.
손가락이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며
익숙하게 깍지를 낍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이럴 바엔 갈라서자던 사람이.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야?

우리 결혼기념일 날... 밤에 기억해? 내가 벌레를 하나 봤어. 자기 머리에서 나왔다가, 다시 머리로 들어가는 걸...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아서 열심히 조사를 하러 다녔어. 내가 너무 늦게 다녀서 미안해... (훌쩍) 내가 너무 많이 걱정시켰지.







당신이 벌벌 떨리는 입술로 릭사엘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신 못지 않게 불안에 가득 찬 모습이 보입니다.
릭사엘은 당신의 질문에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당신과 눈을 마주합니다.
아득하게 당신을 삼킬 듯한 눈동자는,
어딘가 결의에 가득 찼습니다.
살며시 떨던 손은 어느새 단단하게 주먹을 쥔 느낌입니다.
내는 음성 또한, 굳세진 것 같습니다.
릭사엘은 그렇게 당신을 향해 시리게, 또 가슴 어딘가 아프게 웃어보입니다.
그리고는, 툭.
당신의 어깨에 고개를 기댑니다.
아무래도 머리가 어지러운 모양일까요.
릭사엘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다
그 상태로 곤히 잠이 듭니다.
그의 무게가 온전하게 닿습니다.
침대든, 소파든... 일단은 옮겨야할 것 같습니다.

(릭사엘의 가슴팍에 귀를 기대어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하고는) '살아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네 팔을 네 어깨에 걸친 채 낑낑거리며 제일 가까운 소파에 눕히려 애쓴다)
덩치가 커서 무게도 상당한 그를 안고
낑낑거리며 거실로 나아가 소파에 눕히면
말로 형용 못할 복잡한 감정이 듭니다.
대체... 무엇이 릭사엘의 진심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말.
당신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와 닿았던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칠흑같이 까만 어둠. 누군가 당신의 옆에 있습니다.
당신의 손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쓸어냅니다.
손가락 하나하나 매만지다가 짧게 입 맞춥니다.
잠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줍니다.
귓가에는 또 물기 가득한 음성입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4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랑해.. ..사랑해. 보고 싶을 거야. ..내 선택을, 너도 이해할 거야."
불을 켜지 않아도, 당신은 그 누군가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릭사엘입니다.
당신에게 이별을 하자고 고한 사람.
잠기운에 의식이 다시금 아득하게 멀어져 갑니다.
그렇게 한참을 잠에 취해 있으면
희미한 의식이 점점 스며듭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는... 밖에서 나는 것 같습니다.
창 밖을 바라보면, 화창한 햇살이 따스하게 비칩니다.
그동안 우중충한 날씨였는데, 오늘의 날씨는 유난히 좋은 것 같습니다.
구름이 띄워진 하늘은 푸르기만 합니다. 평화롭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요.
밖으로 나가볼까요?

부부침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실까지 향하면
주방에 서 있는 릭사엘이 보입니다.
당신이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서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생긋 웃어보이며 다정한 말을 흘립니다.





(식탁 앞 의자를 앞으로 빼내며) 어서 앉아. 아침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수플레 팬케이크 준비했어. 새벽에 잠시 나가서 버터랑 콩포트도 신선한 걸로 사왔으니까, 같이 준비해줄게.

(흘끔) ...이런다고 내가 이혼을 해주지는 않아.




왜 계속 사라질 것처럼 말을 하는 거야.

이혼 서류 준비해서 거실 탁자 위에 올려뒀어. 아침 먹고 서명하고, 법원에 가자.

내가 너 없이 왜 살아.


최근에 내가 널 상처주게 말했던 것 때문이라면 미안해... 응? 앞으로 내가 조금 더 조심하려고 노력할테니까... 우리 그냥 계속 같이 이렇게 지내면 안 돼?


그건 그냥... 네 말대로 내가 착각한 거야. 네가 그럴 사람 아닌 거 누구보다 잘 아는데... 미안해. 쏘아붙이듯 말해서 미안해...



그래도, 살아야지 유스. 행복하게.

너랑, ...이혼할 바에야 그냥, ... 흑, 그냥 너 따라갈래...


나... 흑, 나 이혼, 절,대 안 할 거야... 양쪽 다 동의해야, 한다고 들었어. 절대... 절대 안 할래...

내가 없어도, 이혼하고 나면 자기는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다 도전할 수 있을 거야. 자기는 늘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았잖아. 응? 다 즐기며 살아야지.
내 소원이야. 네가 행복하게 사는 거.

내 행복은... 넌데...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전부 너랑 같이 하고 싶었던 것들이야.




(한참을 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망설이다 말없이 이혼 서류가 놓인 거실 탁자로 다가간다. 한참을 울어서 눈가가 쓸려 발갛게 부어오른 채 서류들을 빤히 바라본다) ...
... 5년.
5년이야. 우리가 같이 살고 서로만 보기로 약속한 게.
...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혼에 대해서 검색해봤어.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까지 하는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는데... 이혼하는 건 고작 이 종이쪼가리만 법원에 넘기면 남이 될 수 있는 거더라. 하하... 너무... 웃기다, 그치?
고작 이 종이들만 있으면 우리가 보낸 5년의 세월도 그저 의미없이 남이 된다는 게 난... 난... (눈을 깜빡깜빡거리더니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한참을 울다가 이젠 웃기 시작하더니 힘이 다 빠질 때쯤 웃음을 멈춘다.) ... 너무 허무하다.
... 미안해, 릭스.
넌 날 용서할 거지, 그렇지?



하지만... 대체 어떡하려고 그래.


(입술을 잠시 다물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다가) 어제 술김에 했다고 한 말, 거짓말 아니야. 나 곧 죽어.

그래도 너랑은 남이 되고 싶지 않아.




너도 나를 잘 알잖아. 네가 이러면 내가 슬퍼할 것도.

미안해, 이제야 알게 해서.


내가 봤던 건 유충이지만, 성충이 얼마 안 남았겠지.

왜 하필... 너랑...나한테...

그보다 난 자기가, 내가 바람피던 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더 따져 물을 줄 알았는데. 대충 짐작하기로는, 서로 관련없는 얘기처럼 보일 거 아냐.

그리고 너... 네 옆에 있던 그...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여자. 학창시절에 봤던 네 주변에 있던 애들보다 별로였어.
향수도 거지같은 거 썼잖아.





그날 처음 만난 사람이고.
내가 네 의심에 반박을 하지 않고 침묵만 한 건, 네 뇌에 있는 벌레가 내 태도를 안 좋은 쪽으로 비꼬아서 상황을 더 틀어버리기에 그런 거야.
한 번은 내가 늦게 집에 와서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했더니... 너는 투덜거리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어떻게 배우자한테 귀찮으니 가서 잠이나 자라고 할 수가 있어'라고 대답했었어.



... 내가 보고 듣는 것들이 전부 잘못됐을 거란 생각을 못했어.



그래도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아서, 나를 믿어주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화를 냈던 거잖아. 그러니까 갈라서자는 말도 먼저 꺼내지 않은 거고. 그러니까 괜찮아.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네가 바람을 핀다는 의심을 하고 화냈던 건 아니야.
난...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미안. (눈을 꾹 감으며) 자기한테는 딱히 위로가 되진 않겠다, 그치...?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으면 금방 풀릴 문제였는데...

귀엽기는. 그냥 뽀뽀해주면 된다고 몇 번을 얘기해.



















나-빠.
나쁜 릭스야.













좋아, 그럼 10년으로 차감해줄게. (?)

누가 좋다고 고개 끄덕인대?






내가 만들고 나 혼자 하니?






(피식) 남편이 알려줬어. 하고 싶은 건 걱정없이 해야 좋은 거라고.


(씩 웃으며) 또 모른다고 할 거야? 말할 수 없다고 할 거야?








(슬쩍) 이거 꼭 말해야 해?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새로 생겼어.
그러면 안 돼?






...유치해?


허락해줄래, 내 사랑?






그거... 결혼생활 3년차에게도 너무 설레는 말인데.


너랑 있으면 늘 17살이 된 것 같아. 몇 번이고 입을 맞춰도, 네게 사랑한단 말을 들어도, 네 모습을 봐도 늘 그때처럼 설레고 간질거려.
이상하지... 고등학교 졸업한지 한참이고, 너랑 난 이제 학교에서 은밀하게 만날 필요도 없는데 말야.
있잖아, 릭스. 사실 나 주기적으로 꾸는 꿈이 있어. 배경은 늘 학교야.


가끔... 음... (민망해져서 입을 다물었다가 시선을 돌린다) 도서관이든,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에서든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해.
으으.... 나 이거 계속 말해야 해? 갑자기 부끄러워졌어.


엊그제는 예외로 쳐줘. ㄴ, 너도 막 마음에도 없는 말 했잖아.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호하듯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쥐며 눈치본다) 반지 절대로 안 뺄 거라고. 네가 나한테 줬으니까 내 거잖아.

진짜 모르겠어?



그치만 내 사이즈는 아니었는데...

그땐 자기가 많이 말랐었잖아. (키득키득)

(화끈-) ... 기억날 것 같아.



너는 심지어 보석알이 눈에 띌 정도로 크다고, 누가 볼세라 더 신경썼었고.

지금 생각하면 아쉽네. 그땐 그런 것들이 뭐라고 반지를 끼지도 않고 살았다니.

요즘 다이아몬드 시세 올랐던데, 저거 팔고 자기 차 한 대 뽑을까. 어때?

네가 고민해서 준 건데 어떻게 팔아...


새끼손가락에 끼면 맞지 않을까?
아니면...! 녹여서 다른 걸로 만드는 건...?
... 안되겠지?

목걸이로 할까? 아니면 팔찌?





(대답하지 않고 상체를 반쯤 일으켜 너를 빈틈없이 꼭 안아준다. 정적이 어색해질 때까지 그렇게 멈춰있다가, 천천히 안은 팔을 풀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네 어깨에 남은 흉터를 바라본다. 고개를 숙여 다정하게 그부분에 새털처럼 입을 맞추고, 어루만지듯 핥아준다)



바보 유스.


살겠다고 약속해.





그치만 너 없이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지막 소원이란 말까지 해서 내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게 하고...




나빠.



나한텐... 네가 세상에서 제일 귀해. 그러니까... 사라지지 말아줘. 부탁이야.


이기적인 사람이라 미안해.

'나는 몰라도 릭스의 장례는 치르고 가는 게 좋겠지. 릭스는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져도 되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널, 그렇게 못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줘.
(삐죽) 그리고 그런 말은 나만 할 수 있어, 바보야.


너랑 같이 죽지 않을게.
그러니까 이상한 말 그만해.


그건 싫어.
내가 다 가져가고 싶어.


... 이제 뭐하고 싶어?


그, 게 끝이야?




비행기 타다 갑자기 벌레들이 깜짝 놀라서 빨리 죽게 하면 어떡해.


지금은 질릴 때까지 안고 싶어.
네가 눈을 떴을 때의 눈동자가 어떤지, 네 체향은 어떤지 전부 제대로 기억하고 싶어.


... 나 좀 이상한 생각했는데, 역시 박제는 안되겠지.




나 죽을 때 되면 인류박물관에 기증하게...
...아냐, 역시 기증 안할래.







돈이라도 가득 지불해야지.
게다가 자기가 같이 누워줄 때까지 버텨줄 튼튼한 관이어야 한단 말이야.

(피식) 너, 내가 땅에 바로 안 묻고 내 욕심으로 박제해서 좋은 곳 바로 못 갔다고 뭐라 하면 안 돼.

자기 원하는 대로 해.

... 기분 이상하네. 당장 슬퍼해야 좋을지 하루라도 빨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고민을 해야 좋을지...

같이 장 보고 요리하고... 껴안고 영화 보고... 같이 씻고 같이 자고.





올곧게 바라보는 눈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릭사엘은 당신의 가슴팍에 장난스럽게 쪽 뽀뽀를 하고는 몸을 일으키고
당신의 풀어헤쳐진 잠옷을 도로 예쁘게 여며줍니다.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기만 한 손가락.
이렇게 자신밖에 모르는 릭사엘을 몰아붙였던 스스로가
조금은 미워지기도 하는 순간입니다.
잠옷을 단정하게 입고 함께 식탁으로 나아가면
곧 릭사엘이 아침으로 준비해뒀던 수플레 팬케이크를 살짝 데우고
당신들은 팬케이크에 버터와 메이플시럽, 콩포트를 곁들여
오랜만인 것만 같은 단란한 아침 식사를 시작합니다.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별다를 바 없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함께 아침을 먹고, 껴안고 시간을 보내다가,
심심하면 품에 기댄 채 영화 한 편을 보고,
그러고도 심심하면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시시콜콜한 잡담을 즐겁게 늘어놓고,
향긋한 배쓰 오일이 풀어진 욕조에서 함께 목욕을 하고,
젖은 머리카락을 서로 부드럽게 말려주고,
갓 빤 잠옷을 새로 입고 폭닥해진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고, 내일 일정을 공유하는.
그런 별다를 바 없는 시간이
오늘도 찾아왔다가 흘러갑니다.
화창했던 어제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하늘이 어둡습니다.
기분 나쁜 회색의 구름이 하늘을 덮었습니다.
어제와 달리 오늘 몸이 유난히 찌뿌둥한 느낌이 듭니다.
옆자리를 바라보면 늦잠을 자는 릭사엘이
가느다랗게 떠는 숨결을 내쉬며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습니다.
당신이 잠든 릭사엘의 얼굴을 보며 감상하듯 피부를 톡톡 건드려보면
릭사엘은 곧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뜨고,
눈앞에 놓인 당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해사하게 웃습니다.
어제 잠들기 전 대화할 때 릭사엘이 오늘
가볍게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죠.
차를 끌고 나가서 브런치 카페에서 늦은 아침을 함께 먹고
언덕을 한 번 돌아온 뒤 집에 돌아오면 좋을 것 같다고.
하늘은 조금 우중충하고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지만
비가 내리면 그것도 운치있지 않겠냐는 릭사엘의 말이 생각납니다.
당신과 릭사엘은 천천히 외출 준비를 합니다.
자고 일어난 직후라 눈꼽이 끼고 머리가 헝클어진 당신을
깨끗이 세안시키고 빗질해주는 손길에 몸을 잠시 맡기며
언제까지 이렇게 애 취급을 할 거냐고 투덜거리면
릭사엘은 그저 웃으며 평생 해줄 각오로 시작했다고 답하죠.
간단하게 씻고 외투를 챙겨 입으면
릭사엘이 나가자고 당신을 향해 손을 뻗어옵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있는 자동차 키를 챙깁니다.
오늘은 정말 비가 오려나요.
먼저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릭사엘이 운전석에 타고 당신의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기어를 바꿉니다.
밟았던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엑셀을 밟자
당신과 릭사엘이 탄 자동차는 출발합니다.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엔진 소리가 적막을 채워냅니다.




릭사엘은 당신의 대답을 듣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라디오 주파수를 넘깁니다.
신호가 맞지 않는 음악이 잠깐 흘렀다가 사라지고,
대신 엔진 소리와 회색 하늘이 차 안을 채웁니다.
브런치 카페는 생각보다 한산합니다.
유리창이 큰 가게라 하늘은 그대로 내려다보이고,
구름은 낮게 깔린 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당신과 릭사엘은 샌드위치 햄이 가득 든 오픈클럽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당신은 따뜻한 카페라떼를, 릭사엘은 따뜻한 루이보스 티를 홀짝입니다.
머그컵에 손바닥이 살짝 눌릴 때마다 닿는 온기가 따뜻합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계산을 마친 뒤 카페를 나서면
하늘에서는 정말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릭사엘은 혹여 당신이 맞을세라 혼자 근처의 편의점에서
우산 하나를 사와 비닐을 벗기고, 펼친 뒤
우산 아래의 세상으로 당신을 끌여들입니다.
세상이 반쯤 잘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차에 올라타 문을 닫으면 빗소리는 묘하게 또렷해집니다.
작은 물방울 알갱이들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에서
엔진이 조금 달구어진 차량이 다시금 앞으로 나아갑니다.
와이퍼가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고, 도로는 천천히 윤기를 띱니다.
언덕길로 접어들자 확 트이는 시야로
회색과 초록이 섞인 풍경이 물에 씻긴 듯 선명합니다.
릭사엘은 속도를 조금 낮춘 채 말없이 운전합니다.
라디오는 꺼진 상태지만, 빗소리를 감상하고
또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면
차 안은 온갖 소리로 포근하게 가득찹니다.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를 지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언덕의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차는 잠깐 숨을 고르듯 완만해집니다.
아래쪽으로 도시가 흐릿하게 내려다보이고
비는 여전히 성실하게 내립니다.
그 순간, 릭사엘이 아침에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비가 오면 그것도 운치일 거라는 말.





얘기를 못해서 미안해.
오늘이 마지막이야.
자기 머릿속에 있던 벌레를 내 심장으로 옮기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그랬어.
잠시 동안 내 몸에 봉인을 할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은 3일뿐일 거라고.


너무 짧지...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하기에는, 너무 짧지.
...오늘이 3일 째야, 여보.
미리 얘기하면, 슬퍼하느라 시간을 다 쓰게 될까봐 얘기를 못했어. 미안. 나 미워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릭사엘이
오늘 죽는...다고요?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24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릭사엘의 뒤늦은 고백에 화가 나기도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필 우리여야 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짧게나마 남은 시간이라도 행복하게 손에 쥐어보고자 했는데.
왜, 왜, 왜... 벌써 끝이죠?
이렇게 우리의 사랑을 끝낼 순 없습니다.
나는 그대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 걸요.
우리가 왜 헤어져야하나요.
이런 거지 같은 운명에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겠지만,
이런 운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과 이런 슬픈 사랑 하길 원하지 않았어요.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자 릭사엘은 핸들을 돌립니다.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당신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은 틀렸습니다.
당신 없이 내가 행복하게 살리가 없잖아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걸 이뤄줄 수 없어요.
그것이 릭사엘에게는 차마 얘기할 수 없는
얘기하더라도 전할 수 없는 진실이죠.
그 때,
빵-!
커다란 클락션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 듭니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커다란 트럭이 당신과 릭사엘이 탄 차 쪽으로...
파지직-!
큰 굉음과 함께 시야가 돌아갑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
펑, 하얀 에어백이 터지는 소리.
끼이익, 고무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미끌어지는 소리.
파랗고 붉은 소리가 한꺼번에 덮쳐듭니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팔에는 깨진 유리조각이 잔뜩 박혀 아픕니다.
선명했던 시야가 흐려집니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있게 됩니다.
충돌 방향이 제 쪽은 아닌지라 다친 곳은 크게 없는 것 같죠.
에어백도 잘 작동 되어 목숨은 멀쩡한 것 같습니다.
구겨진 차 천장 사이로, 차가운 빗물이 당신의 뺨을 건들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
옆자리에는 머리를 창에 세게 부딪혀 피를 흘리는,
당신이 사랑하는 릭사엘이 보입니다.
새빨간 피가 이마를 타고 뺨에 흘러내립니다.
그의 뒤로 보이는 회색빛 하늘과 같은, 잔혹한 색입니다.
그의 에어백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슬하게 숨을 뱉다가 시선을 돌려 당신을 바라봅니다.
약하게 웃으며 당신의 손을 쥐어냅니다.
당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있는... 그것을 매만지다가
툭, 손이 힘없이 떨어집니다.

사라ㅇ... 쿨럭...
죽음이 우리를 갈라서더라도.
그의 말은 맺어지지 못하고 끊깁니다.

아, 거짓말인 걸까요. 이것도, 그런 환상인 걸까요.
내가 지금 잘못보고 있는 것이겠죠. 참으로 잔혹한 존재입니다.
어쩜 이렇게 진짜 같을 수가 있어요.
어쩜... 이렇게, 이렇게...
떨리는 손으로 떨어진 릭사엘의 손을 잡으면, 차갑습니다.
아니 아직 따뜻해요. 아직 온기가 남아있어요.
당신의 죽음을 억지로 부정합니다.
눈을 떠요.
당신이 없으면, 내가 무엇하러 살아요.
당신만을 사랑하는데.
당신이 멋대로 내게 삶을 살고 싶게 만들어 놓고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입니다.
조금만 덜 사랑할 걸 그랬습니다.
당신도 나도, 서로를 조금만 덜 사랑할걸.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우리, 사랑만 할 걸 그랬습니다.
다른 것 하지 말고 사랑만 할 걸.
사랑하기만 해도 바쁜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인 줄 몰랐던 거죠.
너무 사랑해서, 지금 이 순간이 후회스럽습니다.
당신은 후회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
.
.
당신은 더 이상 샤가이의 벌레, 샨의 제어를 받지 않고,
살아갑니다. 혼자.
.
.
.
장례식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습니다.
울음은 있었고, 애도의 말도 있었지만,
당신의 귀에는 모두 얇은 막을 사이에 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검은 옷자락이 스치고, 이름이 불리고, 고개를 숙이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장면만 남아 있었습니다.
차 안의 온기. 그리고 손에서 빠져나가던 마지막 무게.
집에 간신히 돌아오면 현관은 지나치게 넓어 보입니다.
코트가 걸리지 않은 옷걸이, 반쯤 비어 있는 신발장.
스쳐지나가는 거실마저 오늘은 필요 이상으로 넓어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 침실로 올라가 눕자,
몸이 먼저 옆자리를 찾습니다.
늘 릭사엘이 누워 자던 쪽.
그곳에는 릭사엘에게서 항상 풍기던
파릇한 허브 향기의 잔향이 남아 있습니다.
이불은 가지런하고, 베개는 그대로인데,
그 모든 정돈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당신은 결국 소리를 죽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얼굴을 베개에 묻을수록 숨이 끊어질 듯 훌쩍입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립니다.
한 번.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한 번.
당신은 눈가를 대충 닦고 방금 들어온 현관문으로 겨우겨우 향합니다.
잠금을 풀고 문을 열자, 캡을 눌러쓴 꽃 배송 기사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는 간단한 확인 후, 꽃다발을 건넵니다.
흰색과 연한 초록이 섞인, 소박한 꽃다발.
안개꽃 다발입니다.
배송 기사가 문을 닫고 돌아서면
이 꽃을 누가 당신 앞으로 보내었나 싶습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89 |
| 판정결과: | 실패 |
꽃다발 사이에 무언가가 적힌 카드가 보입니다.
당신이 손을 뻗어 그 카드를 집어 올리면
가느다란 꽃송이 두어 개가 저항하듯 걸리다가
이윽고 살짝 꺾이며 카드를 놓아줍니다.
불현듯 안개꽃의 꽃말이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맑은 마음과, 사랑의 순간.
그리고 죽음.
그리고 이 세 가지 뜻이 어우러져,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 보낸 이, 릭사엘.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면서 이런 걸 보내면... 난... 아, 릭스...' (지금이라도 따라갈까. 아니, 너는 그런 걸 원치 않겠지. 그치만 난 네가 없으면 이제 어떻게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후 구제 시나리오 <치노펠례 ~하현망간의 달~>로 이어집니다.
